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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 (목)

갑분싸, 고답이…세종대왕님도 ‘별다줄’ 하셨을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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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 계기교육 현장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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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분싸’(갑자기 분위기 싸해짐), ‘핵아싸’(정도가 심한 아웃사이더), ‘마상’(마음의 상처), ‘고답이’(고구마 먹은 듯 답답하게 구는 사람)…. 요즘 청소년들이 쓰는 줄임말이다. ‘별다줄’(별걸 다 줄이네)이라는 말도 생겼다. 일상 대화를 계속 줄이다 못해 ‘별걸 다 줄이네’라는 말까지 줄였다며 아이들 사이에서도 자조적으로 쓰인다.

‘한글 제대로 배우기’는 공교육의 핵심

당연히 부모세대는 이런 줄임말을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한다. 인터넷이 상용화하던 시절의 유행어 ‘ㅎㅇ’(하이)와 ‘ㅂㅂ’(바이바이) 정도는 익숙해도, 아이들 휴대폰 속 메신저 대화창의 ‘초성 대화’(한글 초성으로만 대화를 주고받는 것)를 보면 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싶다.

“줄임말을 왜 사용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광주 두암중학교 1학년 김주환군은 효율성을 첫 손가락에 꼽았다. 어린 시절부터 각종 스마트 기기를 사용한 세대인 만큼 빠르고 간편한 대화가 익숙하다는 이야기다. ‘좋아요’라는 표현도 엄지손가락을 치켜든 아이콘 한번 터치하면 전달되는 세상이기는 하다. 김군은 “주어, 동사 등을 한 문장 안에 다 넣어 말하면 메신저 할 때 오래 걸린다. ‘ㅇㅈ’(‘인정’의 초성. 상대방 의견에 동의한다는 뜻)이라고 치면 훨씬 짧고 효율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했다.

이런 대화법이 십대들의 언어유희 문화일 수 있지만, 정제된 한글과 순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배우고 익히는 것도 공교육 과정에서 중요하다. 572돌 한글날을 맞이해 공교육 현장에서는 10월4~14일을 한글날 교육 주간으로 정하고 계기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온새미로, 사랑옵다’…우리말 매력에 푹 빠져

지난 5일 광주광역시에 위치한 두암중학교를 찾았다. 이 학교 범혜영 교사는 국어과 ‘마음을 담은 언어-배려하며 말하기’ 단원과 한글날 교육 주간을 연계해 1학년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범 교사는 “아이들이 실제 얼굴을 마주하고 나누는 대화보다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며 말하는 방식에 익숙하다. 이번 계기교육을 통해 ‘생활 언어의 온도’를 높이는 국어과 수업 지도안을 구성·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572돌 한글날 계기교육 주간 맞아

두암중, 한글사랑 캠페인 열고

‘순우리말’로 격려하는 교실 만들어

군포대야초, 교육연극기법 활용해

훈민정음 만들어진 뜻 살피고

전교생이 ‘언어통장’ 기록하며

고운 말 쓰는 학교문화 자리잡아


이날 두암중 1학년 학생들은 1~3교시에 걸쳐 ‘마음을 담은 우리말로 디자인 작품 만들기’에 도전했다. 격려의 말을 건네고 싶은 사람을 정한 뒤 자신이 좋아하는 시, 노래의 한 구절을 골라 엽서를 쓴다. 엽서 내용을 바탕으로 순우리말 4~6글자의 문구를 정해 캔버스에 캘리그라피 작품을 만들어보는 것이다.

아이들은 부모님, 친구, 혹은 자기 자신에게 건네는 응원과 바람의 말을 제법 고민하며 적기 시작했다. ‘온새미로’(가르거나 쪼개지 않고 생긴 그대로), ‘끌끌하다’(마음이 맑고 바르고 깨끗하다), ‘사랑옵다’(생김새나 행동이 사랑을 느낄 정도로 귀엽다) 등 순우리말부터 ‘그럴 수 있어’, ‘너는 내 사람, 사랑, 자랑’ 등 상대의 마음을 보듬어주는 따뜻한 우리말 작품들이 한 시간 만에 쏟아져 나왔다.

김동현군은 “순우리말을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케바케’, ‘띵작’ 이런 말도 재미있지만 ‘빛’, ‘달보드레’ 등을 다시금 발음해보며 한글이 참 아름답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범 교사는 10월 한 달 동안 아이들 스스로 언어 사용 습관을 돌아보고 확인할 수 있도록 ‘말을 바꾸자! 나를 바꾸자!’ 캠페인도 꾸렸다. 외계어·비속어 쓰지 않기, 친구를 무시하는 말 하지 않기, 줄임말 쓰지 않기 등을 지키면 ‘고운말 스티커’를 모둠별로 붙일 수 있다. 범 교사는 “이런 작은 동기부여 활동 하나하나가 아이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단순히 ‘욕하지 마’, ‘그런 말은 나빠’라는 식으로 지도하기보다는 ‘좋은 말의 좋은 점’을 접해볼 수 있도록 어른들이 노력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우리 반에 ‘한글왕’이 나타났어요!

한글날을 맞이해 세종대왕을 직접 교실로 ‘모신’ 학급도 있다. 지난 10월5일 경기 군포대야초등학교 4학년 1반 교실에서는 ‘한글왕’을 뽑았다. 그동안 교실에서 바른말 실천하기 등에 앞장선 정선아양이 교실 앞 빈 의자에 앉아 ‘1일 세종대왕’을 맡았다. 친구들이 ‘훈민정음을 왜 만들었나요?’부터 ‘가장 좋아하는 한글 단어를 말해주세요’ 등을 질문하면 정양이 역사 속 인물이 되어 대답해주는 활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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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연극 기법 가운데 빈 의자를 활용한 ‘핫 시팅’(hot seating) 수업으로, 아이들은 이 과정을 통해 집현전 학자가 되어보기도 하고 한자를 몰라 고생하던 백성 입장에서 질문하기도 했다. 이 학교 노은정 교사는 이 수업을 위해 한글날 교육 주간에 맞춰 국어, 미술, 창의적 체험활동 등 교육과정을 재구성했다. 5차시 동안 몸으로 자음 표현하기, 감정카드를 활용한 한글 말하기, 한글왕 뽑기, 언어통장 꾸준히 기록하기 등을 진행하고 있다. 노 교사는 “‘핫 시팅’ 교육연극 기법을 활용하면 아이들이 쉽게 역지사지 할 수 있다. 빈 의자에 세종대왕이 앉아있다는 설정만으로도 아이들은 우리말의 소중함을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고 했다. “일종의 인터뷰입니다. ‘한글 모양은 어떤 방식으로 만들게 됐나요?’부터 ‘우리가 쓰는 줄임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까지 다양한 질문들을 주고받게 되지요.”

한글의 우수성 알리기에만 초점 맞추는 건 옛날 방식의 계기교육이다. 최근에는 ‘생활 속에서 우리말 제대로 사용하고 이해하기’ 등 실천법에 방점이 찍혀있다. 학생언어문화 선도학교인 군포대야초의 모든 학생들에게는 특별한 통장이 있다. 바른말이 적립되고, 고운말이 ‘복리’가 되어 쌓이는 ‘언어통장’이 그것이다. 은행 통장과 똑같이 생겼는데, 매일 자신의 한글 사용 습관을 기록하고 점검해볼 수 있어 교육 효과가 높다.

전교생이 1년 동안 12장의 언어통장을 채우기 시작하니, 실제 교실 안팎에서 ‘나쁜 말’ 들리는 횟수가 확 줄었다. 노 교사는 “용돈기입장을 생각하면 된다. 수입과 지출의 개념을 아이들의 언어생활에도 적용한 것”이라며 “가정에서도 시도해볼 수 있다. 외계어나 줄임말 남용에 경각심을 갖고, 용돈이 모아지듯 좋은 말도 수집할 수 있다는 점을 알려주며 자연스레 한글 사랑 교육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글을 제대로 말하고 쓸 수 있는 역량은 ‘뉴스 리터러시’ 교육으로도 이어진다. 실시간으로 가짜뉴스가 만들어지는 요즘 같은 때, 정보 가치를 따져 받아들이는 능력은 필수적이다. 노 교사는 “초등 시절부터 공교육 현장에서 한글 교육을 충실히 하며 ‘언어 다루는 법’을 꼼꼼하게 알려줄 필요가 있다. 아이들이 우리말을 잘 익히고 배우면 자연스레 뉴스 리터러시 교육도 수월해진다”고 강조했다.

김지윤 기자 kimjy13@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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