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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6 (토)

[Why] "이 땅 지키다 죽어야지"… 조선의 간디는 끝내 월남을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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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길의 인물 에세이 100년의 사람들] (34) 조만식(1883~1950)

조선일보

일러스트=김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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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를 살던 우리는 조만식이라는 이름을 어려서부터 듣고 자랐다. 그때 이미 그는 '조선의 간디'라고 불렸다. 체구는 크지 않지만 두 눈은 초롱초롱하였는데 우리는 그 어른이 양복을 입은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조선민주당을 조직한 조만식이 평안남도 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일본인이 쓰던 국민학교 자리에 새로 살림을 차렸다. 나는 길 건너 있던 일본인 중학교 자리에 옮겨온 상수인민학교에서 다시 가르치게 되어 조회 시간이면 운동장에서 일장 연설을 하는 고당 조만식의 목소리를 확성기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고당의 훈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생각난다. 1946년 5월의 일이었다. "여러분, 인간의 지식과 지혜는 날마다 발전하여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만들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노력하면 개인이 어디나 가고 싶은 곳으로 날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고당의 자세한 동작은 볼 수 없었지만, 겨드랑이에 두 손을 가져가 주물럭거리는 시늉을 하면서 "그런 장치를 하면 손쉽게 날아다닐 수 있을 겁니다"라고 했다. 고당의 그 훈화를 들은 사람은 오늘 이 지구 상에 나밖에 없을 것이다.

고당은 강서 사람이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어려서는 서당에 다니며 한문을 익혀 그 실력이 상당한 수준이었다. 열세 살에 결혼하였고 열다섯 살부터는 사업에 종사하였다. 젊어서는 탈선한 일도 있었지만, 일찍 기독교에 귀의하여 한평생 술과 담배를 멀리하였다. 그는 23세가 되어서야 평양숭실학교에 입학하였고 3년 뒤에 졸업하고 동경에 있는 유명한 정칙영어학교에 입학하여 열심히 영어를 공부하여 영어 실력도 대단하였다. 그가 명치대학에 입학한 것은 그의 나이 28세 때였고 일본에서 유학하는 동안 그는 한인들을 위한 교회를 설립하였다. 31세에 뒤늦게 일본 명치대학을 졸업한 조만식은 평북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에 채용되었고 2년 뒤에는 그 학교 교장으로 추대되었다. 그가 교장직을 사임하게 된 동기는 모르겠지만 바로 그해에 3·1운동이 일어났다. 그는 일경에게 체포되어 평양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듬해 출옥하여 조선물산장려회를 설립하게 되었는데 남강 이승훈을 형무소로 찾아갔더니 다시 교장직을 맡아달라고 부탁해 수락했으나 총독부가 그의 취임을 허락하지 않았다. 같은 해 조선민립대학 기성회 집행위원에 선임되었고 그 뒤에 신간회와 YMCA 운동에도 참여하여 전국적 인물로 부각되었다. 나이 50이 되던 해 조선일보 사장으로 초빙되어 취임하였으나 1년을 버티다 사임하였다. 그때 그가 뼈저리게 느낀 것은 이 겨레의 지역감정이라는 악습이었다. 조만식은 그래서 한평생 "고향을 묻지 마라"는 표어를 내걸고 지역감정 타파에 앞장섰다. 고당은 2번 상처(喪妻)하고 55세에 전선애를 만나 결혼했고 딸 하나, 아들 둘을 얻었다.

일제 말기 학병에 나가라고 권하는 고당의 글이 당시 서울에서 발행되던 매일신보에 실렸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글에는 이런 사연이 있다. 내 평고 후배인 고명식은 두드러진 사람이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매일신보 평양 지국장이었다. 본사에서 평양 지국장에게 명령을 내렸다. 학도병에 나가라는 글을 하나 조만식에게 받아 오라는 것이었다. 지국장으로서는 그런 부탁을 고당에게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본사에서는 지국장을 계속 못살게 굴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그런 글을 제 손으로 한 편 써서 조만식 이름으로 본사에 보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얼마 뒤에 해방이 되었고 지국장은 부끄러워 자살하였다는 사실을 평양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김일성과 조만식의 철학과 인생관은 하늘이 땅에서 멀듯 아득한 것이었으므로 그의 정치 생명은 풍전등화였다고 할 수도 있다. 많은 사람이 월남하면서 고당에게도 함께 떠나자고 왜 권하지 않았겠는가. 그는 자신의 신변이 위험하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탈북을 거절하였다. "이 사람아, 나라도 이 땅을 지키다 여기서 죽어야지 떠나서야 되겠는가"라고 탈북 권유를 거절했다는 것이다. 고당은 이미 60이 넘은 노인 몸이었지만 가족들에게는 월남할 것을 권하고 자신은 그대로 북에 남아 있다가 대동강변 모처에서 총살되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나이 68세였다. 인도의 간디가 그렇게 세상을 떠났듯이 한국의 간디도 총에 맞아 쓰러졌다. 그는 그토록 사랑했던 조국 땅을 하직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영원한 나라로 떠났다. 오산에서 고당의 정신을 배운 민족 시인 김소월이 JMS(조만식)에게 제 잘못을 뉘우치는 시 한 수를 띄웠다.

"평양서 나신 인격의 그 당신님, 제이 엠 에스/ 덕 없는 나를 미워하시고/ 재조 있던 나를 사랑하셨다/ 오산(五山) 계시던 제이 엠 에스/ 십년 봄 만에 오늘 아침 생각난다/ 근년 처음 꿈 없이 자고 일어나며, 얽은 얼굴에 자그만 키와 여윈 몸매는/ 달은 쇠끝 같은 지조가 튀어날 듯/ 타듯 하는 눈동자만이 유난히 빛나셨다/ 민족을 위하여는 더도 모르시는 열정의 그 님."

[김동길 단국대 석좌교수·연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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