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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 (일)

[기고]반갑고도 아쉬운, 대법원의 ‘노조할 권리’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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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15일, 대법원은 전국학습지산업노동조합이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이하 ‘노조법’)상 노조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이번 판결은 학습지노조가 노조법상 노조라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한 것이다. 1999년 (주)재능교육의 학습지 교사로 조직된 재능교육교사노동조합이 설립됐고, 2000년 학습지 교사들의 산업별노조라고 할 전국학습지산업노동조합이 설립됐다. 재능교육교사노조는 2000년부터 재능교육과 단체협약을 체결해왔고, 2006년 학습지노조와 통합한 이후에도 단체협약을 이어갔다. 요컨대 학습지 교사와 학습지노조는 노조 결성 이후 10년이 넘도록 행정관청으로부터 설립신고증을 받는 등 노조법상 노조의 지위를 확인받았고, 단체교섭 등 노사관계를 발전시켜나갔다.

경향신문

기류가 바뀐 것은 2008년 재능교육이 일방적으로 단체협약 해지 통보를 하고 이후 노조의 단체교섭 요구에 응하지 않은 때부터다. 나아가 회사는 2010년 말 노조를 탈퇴하지 않은 학습지 교사와 재계약을 하지 않는 방식으로 조합원을 모두 해고했다. 2012년 서울행정법원은 학습지노조가 노조법상 노조임을 인정하면서 재능교육의 계약해지는 부당노동행위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2014년 서울고등법원은 이를 뒤집었지만, 지난주에 대법원이 다시 학습지노조를 인정한 것이다.

이번 판결은 이미 십수 년째 노조로서 인정받고 정상적인 노사관계를 형성해왔던 학습지노조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 사용자와 고등법원의 판단을 바로잡은 점에서 의미가 있다. 노조 활동을 이유로 해고된 학습지 교사들은 이후 4년을 더 거리에서 싸워야 했고, 결국 2014년 재능교육과 단체협약을 다시 체결하고 복직했다. 부당노동행위로 피해를 입은 노동자를 법은 제때 구제하지 않았고, 당사자의 노력으로 사태가 해결된 지 수년이 되어서야 당연한 판결을 내놓은 것이다. “너무 늦은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고 할 수밖에 없는 지점이다.

이번 대법원 판결에서 눈에 띄는 대목은 “노동조합법상 근로자에 해당하는지는 노동3권을 보장할 필요성이 있는지의 관점에서 판단하여야 하고, 반드시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한정된다고 할 것은 아니다”라는 판례 법리를 재확인한 부분이다. 대법원은 이미 2004년 실업자·구직자에 관해, 2014년 골프장 경기보조원에 관해, 2015년 미등록 이주노동자에 관해, 경제적 약자의 지위에서 다른 사업주를 위한 노무를 제공하는 사람들의 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을 보장하는 것이 헌법 제33조의 취지에 부합한다고 밝혀왔다.

지난 20여 년간 ‘비정규직’ 노동형태가 확산되면서, 하나의 사용자와 근로계약을 맺고 전속적·장기적으로 노무를 제공하는 고용형태를 표준으로 삼는 노동법은 그 실효성이 의문시되어 왔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단기 계약직으로, 단시간 혹은 호출형 노동자로, ‘특수고용’이라 불리는 개인도급 노동자로 여러 일자리를 떠돌며 생계를 꾸리고 있다. ‘정규직’을 표준으로 삼는 노동법은 이들에게 적절한 보호를 제공하지 못하지만, 노동조합으로 모이면 그나마 최소한의 권리라도 지킬 수 있다. 그러나 사용자, 정부, 법원은 이들이 근로계약을 맺은 근로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헌법상 노동3권을 행사하는 것마저 금지해왔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특정 사업자에게 고용되지 않은 노무제공자 역시 집단적으로 단결함으로써 노무를 제공받는 사업자와 대등한 위치에서 교섭할 수 있는 권리 등 노동3권을 보장하는 것이 헌법의 취지에 부합한다는 점을 재확인한 것이다.

그런데 이번 대법원 판결에서 노조법상 근로자에 해당하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서 “노무제공자와 특정 사업자의 법률관계가 상당한 정도로 지속적·전속적인지” 등 여전히 정규직 고용형태를 표준으로 삼은 지표를 제시한 점은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앞서 대법원이 인정한 바와 같이, 노조법은 특정 사업자에게 노동자가 소속될 것을 전제로 하지 않는 데다가, 실업과 취업을 반복하며 한 사업자에게 전속되지 못하고 불안정한 일자리를 떠도는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하자는 것이 애초 논의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변화하는 노동현실에 늘 100발자국쯤 뒤떨어지는 대법원 판결을 딛고서, 모든 노동자의 노조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입법에 즉각 나서야 할 이유가 또 한 번 확인되었다.

<윤애림 서울대 고용복지법센터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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