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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3 (일)

[책과 미래] 신은 난민의 얼굴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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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오두막으로 들어갑시다. 그곳에서 빵과 포도주로 양껏 배를 채운 다음, 그대가 어디에서 왔으며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견뎠는지 이야기해주시오."

'오디세이아'(14권 45~47행)에서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가 거지꼴을 한 늙은이한테 말한다. 늙은이의 이름은 오디세우스. 트로이전쟁의 영웅으로, 긴 유랑 끝에 이제 막 고향으로 돌아왔다. 금의환향은 아니다. 삶의 거센 풍파가 그의 정체성을 빼앗아 오디세우스를 자기 고향에서도 낯선 자, 즉 이방인으로 만들었다. 이제 그는 누구도 알아볼 수 없는 자, 한때 키클롭스를 무찌르며 그가 예언한 바대로 '아무도 아닌 자(outis)'가 되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채 거지꼴을 한 오디세우스가 나타나자 사나운 개들이 달려들어 위협한다. 나그네를 괴롭히는 개들은 어디에나 있다. 개들이 노리는 것은 언제나 이방인, 장애인, 여성, 동성애자, 비정규직, 어린이 등 '아무도 아닌 자'다. 벌거벗은 자들, 목숨은 분명히 있으나 정체(ID·신분)가 없어서 아무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들의 고기다. 개들은 사람의 도리를 모른다. 일단 목청을 돋우어 컹컹대고 우선 이빨로 물어뜯는다.

오두막 안에서 황급히 뛰어나온 에우마이오스는 개들을 쫓아내고 나서 늙은 나그네, 오디세우스한테 급히 사과한다. "노인장! 하마터면 개들에게 큰 봉변을 당할 뻔했구려. 그랬다면 그대는 내게 치욕을 안겨주었을 것이오."(37~38행) 이것이 문명이다. 자신의 집 앞에서 '아무도 아닌 자'가 공격당하는 것을 수치로 여길 때 문명은 성립한다. 벌거벗은 이를 집 안으로 맞아들여 기꺼이 따스한 잠자리와 정성 들인 빵과 포도주를 대접할 때 문명은 성립한다.

에우마이오스가 이어서 말한다. "나그네여! 그대보다 못한 사람이 온다 해도 나그네를 업신여기는 것은 도리(themis)가 아니지요. 모든 나그네와 거지는 제우스에게서 오니까요."(56~58행) 모든 나그네는 제우스한테서 온다. 신은 나그네의 얼굴을 한 채 우리 앞에 나타난다. 그를 박대하는 것은 곧 신을 쫓아내는 행위이고, 정의의 여신 테미스의 법을 어기는 것이기도 하다. 희랍어 테미스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지켜야 할 관습이나 질서를 뜻한다.

제주도에 들어온 예멘 난민 500여 명 때문에 사회적 논란이 뜨겁다. 종교 분쟁을 피해 입국한 이들은 신분을 잃고 '아무도 아닌 자'가 되었다. 인류 앞에서 우리의 정의를 보여줄 때가 되었다. 우리가 도리를 다하는 문명인임을 드러낼 기회를 잡았다. 우리 안의 개들을 무찌르고, 우리의 인간됨을 증명하자.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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