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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7 (월)

“페미니즘 붐인데…” 출판업계 ‘배운 사람들’의 성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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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출판노조 출판업계 ‘성차별 보고서’

외모 강조·승진 불공평 등 심각

“여직원 가만 있어” 배려로 포장된 차별

성희롱 교육땐 “잠재적 가해자 취급 마”

여성 노동자 절반 넘어도 성폭력 여전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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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출판계는 페미니즘을 다룬 서적이 붐을 이루고 있습니다. 2015년 ‘메갈리아’ 커뮤니티의 출현, 2016년 ‘강남역 10번 출구 살인사건’과 해시태그 문화계 성폭력 말하기(#○○_내_성폭력)에 이어 올해 초 서지현 검사의 성추행 피해 폭로로 시작된 ‘미투’ 운동까지. 젠더 이슈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대중적 요구에 힘입어 서점가에선 판매 부수 70만권을 돌파한 작가 조남주씨의 소설 <82년생 김지영>(2016), ‘맨스플레인’이란 개념을 제시한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2015, 리베카 솔닛)를 비롯해 그동안 번역되지 않았던 ‘페미니즘 고전’ <백래시>(2017, 수전 팔루디· 1991년 출간) 등이 독자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관련 기사: 동인지가 다진 ‘페미니즘’, 출판시장 거대한 물결로)

그렇다면 최근 페미니즘 책이 중요한 콘텐츠로 등장하고 있는 출판업계 현장에는 정작 책의 내용처럼 ‘성평등’이 실현되고 있을까요? 우선 한국 출판업계 종사자들의 성비부터 궁금해졌습니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발표한 ‘2015년 출판산업 실태조사’를 보면, 한국 출판업계 고용 노동자(정규직·비정규직 포함 전체 2만8483명, 외주 노동자 제외)의 성비는 2014년 기준 남성 48.3%(1만3750명), 여성 51.7%(1만4733명)로 여성의 비율이 조금 더 높습니다. 업계 종사자의 절반 이상이 여성인 셈입니다.

그런데 여성 종사자가 많다고 해서 출판업계에 ‘성평등’이 실현되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여성 출판노동자들이 “아니오”라는 답을 내놓았기 때문입니다. 전국언론노조 출판노조협의회 여성위원회가 지난 3년 동안 여성 출판노동자 25명을 심층면접 조사해 20일 발표한 ‘2018 출판산업 여성노동 실태조사’ 보고서에는 출판업계에 만연한 성차별 문화가 적나라하게 담겨 있었습니다.

1. ‘유리천장’은 분명 존재한다



“저희 회사는 ‘유리천장’이 있어요. 회사 이사님이 대놓고 얘기하셨던 게 ‘대학원 다니라’고. 왜냐면 우리 회사에서는 여자들 (승진을) 잘 안 해주니까. 그래서 계속 임원까지 할 수 있으려면 대학원을 다녀야 한다고 하니까 저희 (회사) 막내 친구도 다니는 거고. 저한테도 (이사님이) 끊임없이 계속 얘기하시거든요. ‘내가 시간을 빼 줄테니 (대학원) 다녀라’고.” (마케팅/영업/관리 노동자 ㄱ씨)

ㄱ씨는 자신이 근무하는 출판사에서 여성이 승진하려면 “대학원 진학은 필수”라고 말했습니다. 이 회사의 ‘이사님’은 공공연히 여성 직원들에게 “승진 기회를 유지하려면 대학원에 진학해 미리 준비해야”한다는 ‘자상한 조언’을 빼먹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ㄱ씨가 다니는 출판사 남성 직원들은 승진을 위해 “대학원에 진학하라”는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남성 직원들은) 주로 영업팀에 속해 있기 때문에 대학원 학위가 중요하지 않고, 자기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을 외부에서 데려와 파벌을 형성하기 때문”이라는 알쏭달쏭한 설명이 그 이유였습니다. 남성과 여성 모두 동일한 대졸 학력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에게만 추가적인 ‘승진 스펙’을 요구하는 성차별적 관행이었습니다.

2. 책 만드는데 ‘외모’를 왜 찾나요?



“외모 지적 같은 건 진짜 되게 일상적이었던 것 같아요. 뭐 머리를 안 감고 왔냐, 옷이 그게 뭐냐. (중략) 머리 스타일… 옷 입는 거 전부. 되게 일상적으로 (외모 지적) 얘길 했고.” (편집 노동자 ㅂ씨)

ㅂ씨는 자신이 다녔던 출판사 사장으로부터 외모와 스타일에 대해 끊임없는 지적을 받았다고 털어놓았습니다. 한국 사회에는 흔히 ‘여직원의 외모가 곧 회사의 대외 이미지’라는 통념이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뉴스를 진행하는 여성 아나운서의 안경 착용은 암묵적으로 금기시되거나, 항공사 여성 승무원들의 경우 바지 유니폼을 신청하면 사무실에 불려가는 등 ‘외모 규제’에 시달립니다. (▶관련 기사: 여성 승무원들 “바지 유니폼 신청하면 사무실 불려가요”) 그러나 외모를 가꾸는 것과 개인의 업무 능력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요? 책을 만드는 여성 노동자들이 사무실에서 ‘아름다울 것’을 강요받는 상황을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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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당연히 여성/남성 직원이 해야 하는 일



“여성적 역할과 남성적 역할을 뚜렷하게 구분하더라고요. 예를 들어, 손님이 오면 차를 내주는 것은 여자가 할 일, 이런 식의 생각이 약간 굳어 있어요. 밥 먹으러 가면 연차도 더 높고, 나이도 더 많고, 애도 있고 그런데도 여자들이 수저 놓고 그래요. 저자들이 (회사에 올 때) 간식 같은 것 가지고 오잖아요. 그런 걸 잘라서 나누어 주는 것도 여자 분들이 해요. 무조건 여자가. 그리고 여자 직원에게 시켜요.” (마케팅/영업/관리 노동자 ㅎ씨)

“이제 회사에서 뭐... OO님(회사 상사)한테 어떤 쪽으로 영업을 좀 신경을 써라, 이러면 ‘아, 아줌마 혼자서 영업을 어떻게 하냐’고 오히려 막 그 분이 이런 얘기를 많이 하시더라고요. ‘당연히 남자가 (해야) 하고, 내가 가더라도 남자랑 같이 가야지. (안 그러면) 말이 먹힐 것 같냐’라는 얘길 하시죠. 그런 인식 때문에 좀 어려운 것 같아요. 영업을 하는 여성 노동자 입장에선.” (마케팅/영업/관리 노동자 ㅅ씨)

“인문사회과학출판인협의회 같은 곳에 가면 마케터라는 직종이 남성 노동자가 굉장히 많고, 그 안에서 체육대회를 한다고 하는데 종목들도 다 남성 위주인 거잖아요. 그런 곳에 가서 좀 굉장히 따라가는데 힘들었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고...” (편집 노동자 ㅍ씨)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젠더 이슈’와 관련된 논쟁이 생기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사무실 정수기 물통을 누가 교체하는가’에 대한 하소연입니다. 상당수의 남성들은 ‘정수기 물통을 갈 때 여자 직원들은 무겁다고 빠지지 않냐. 정수기 물이 떨어지면 꼭 남자 직원을 찾는다’고 불만을 터뜨립니다.

그런데 이 ‘성별 분업’에 대해 여성 출판노동자들도 할 말이 많았습니다. “왜 회사에 손님이 오면 여자 직원이 차를 내야 하냐”, “사무실에서 간식을 나누는 일을 왜 꼭 여자 직원에게만 시키냐”와 같이 여성 노동자들이 겪는 ‘성차별’도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상자 안 출판사 여성 노동자 ㅅ씨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보다 적극적인 영업 활동을 제안했던 여성이 “아줌마 혼자서 영업을 어떻게 하냐”는 냉대를 받은 것처럼, “당연히 남자 직원이 해야 하는 일”, “무조건 여자 직원에게 시키는 일”이 따로 있다고 여기는 가부장적 조직문화 속에서 여성은 일상적 업무 속에서도 차별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4. ‘배려’로 포장된 ‘차별‘



“이게 우리를 배려한답시고 하는 것들이 있는데, 진정한 의미의 배려는 아니란 생각이 들 때가 있거든요. 예를 들어, (회사 직원들끼리) 놀러가서? ‘여직원은 아무것도 하지 마. 남자들 움직여’라고 하는 거. 그렇게 하는 걸 되게 자랑스러워하고, ‘멋진 남자’라고 생각하는 거 귀여우신데요. 그건 진정한 배려는 아니죠. 그런데 그런 행동을 하면서 자신의 가치가 굉장히 높아진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마케팅/영업/관리 노동자 ㄱ씨)

여성 출판노동자들은 남성들이 여성들을 배려한다는 차원에서 자신들을 열외시키거나 특별한 대우를 하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고마움의 감정과는 별개로 그러한 행동이 여성 입장에서 “진정한 의미의 배려는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여성도 어느 곳에서든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주체적인 존재인데, ‘남자가 할테니, 아무것도 하지 마’라는 배려가 ‘아무거나 할 수 있는’ 여성들의 활동반경을 오히려 좁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직원은 아무것도 하지 마”라는 ‘배려 아닌 배려’는 진짜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 ㄱ씨의 말처럼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상대가 기대하지도, 원하지도 않은 ‘배려’는 또 다른 차별일지도 모르니까요.

5. ‘배운 남자’의 모순된 젠더 감수성



“성희롱 (예방) 교육을 받으라고 하면 (남성 직원들이) ‘왜 우릴 잠재적 가해자 취급해?’ 이렇게 되니까. 교육은 (받는다고) 체크했지만 (실제로) 의무적으로 받고 있진 않거든요. 거기(성희롱 예방 교육)에 대한 거부감이 있어요. 누구나 좀 다 그런 것 같아요. 교육 받는다는 것에 대해서. 그것도 좀 되게…. ‘우린 당연히 (성희롱) 안 할 거니까’라는 인식이 있는 거죠.” (마케팅/영업/관리 노동자 ㅇ씨)

“이를테면 술 먹고 노래방에 갔을 때, ‘블루스를 춰라’고 말하는데 추지는 않아요. 대신 (여성 노동자에게) ‘어우 왜 저래’, ‘뻣뻣하다’, ‘서울 깍쟁이’라는 식의 말을 듣고. 그 자리는 무마되고…. (중략) 꽤 높은 직급의 (회사) 사람 중에 술만 먹으면 허그를 하는 사람이 있어요. (중략) 근데 이게 도대체 무슨 친근감의 표현인지, 성추행인지 약간 정색하고 애기하기도 뭣한? 출판사들이 규모가 막 크지 않다 보니까 친근감 표시라고 헤드락 걸고 그런 식으로 (표현을) 많이 하거든요. 그래서 그때는 뭔가 말을 못 하겠더라고요. 제가 입사한 지 얼마 안 됐기도 해서 ‘이게 뭔가’ 싶었는데, 그런 일이 되게 많았어요. (중략) (성추행에 대해) ‘손을 이렇게 하시면 안 되죠’ 이런 정도는 했는데, 그걸 그 다음날 따졌어야 했나? ‘당신이 실수를 한 거다’라는 얘기를 했어야 됐나? 뭐 그런 생각은 들었는데 그냥 넘어가고....” (편집 노동자 ㄷ씨)

“‘여기도 똑같구나’라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이 사람들(남성 출판노동자) 되게 인문 책 읽고 젠체하지만 결국 여성주의적 인식은 되게 천박하고 똑같은 사람들이구나.” (편집 노동자 ㄴ씨)

지난 봄, 고은 시인과 배용제 시인 등 ‘문단 내 성폭력 사태’가 불거졌을 때 대중은 소위 ‘지식인’이라고 불리는 작가들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출판계 역시 전체 종사자 중 고학력자의 비중이 높아 ‘지성적인’ 업계로 통합니다. 하지만 ‘페미니즘 책’을 만드는, 스스로 ‘알 거 다 아는 사람’, ‘당연히 (성폭력 가해를) 안 할 사람’이라고 여기는 ‘배운 남자’들 사이에서도 성폭력은 계속 벌어져 왔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왜 성희롱 예방 교육에 거부감을 보이는 것일까요?

선담은 기자 s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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