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0.11 (금)

대학 교수의 성폭력은 어떻게 무마되는가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21] “경희대 교수, 학생 피해자 있었다”…

성폭력 무마하는 문화와 싸우는 페미니즘 소모임의 고독한 싸움


한겨레21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2018년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미투 운동이 사그라든 모양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기사 분석 포털 ‘빅카인즈’로 분석해보면, 중앙일간지 8곳과 방송사 4곳이 2월10일~3월9일 한 달간 2464건의 미투 기사를 생산하던 것이 4월10일~5월10일 한 달간 683건으로 4분의 1 줄었다. 문화예술계나 일반 기업, 초·중·고교를 막론하고 봇물처럼 쏟아지던 미투가 잠잠해졌지만, 여전히 부글부글 끓는 곳이 있다.

최근 나오는 #미투 관련 기사는 대체로 대학이 진앙지다. 지난 5월3일 성신여대 사학과에서는 학생 성폭행 의혹이 있는 교수가 피해 학생에게 가혹행위를 했다는 학생들의 폭로가 나와 학교 본부가 조사에 들어갔다. 서울대에선 성폭력으로 정직 3개월 징계를 받은 사회학과 H교수의 징계 수위가 낮다며 파면을 요구하는 총학생회장의 단식투쟁이 5월8일 시작됐다.

경희대 국문과의 #미투도 현재진행형이다. 2016년 12월 발족한 경희대 국문과 페미니즘 소모임 ‘흰’의 노력으로 올해 학생회에 ‘반성폭력임시특별위원회’가 생겼고, 국문과 반성폭력 내규를 만드는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4월부터는 학과 내 성차별 및 여성혐오 사례를 공론화하는 ‘릴레이 대자보’를 하고 있다. 릴레이 대자보에 2016년 2월 경희대 익명 페이스북 페이지를 통해 공론화된 국문과 ㄱ교수의 성추행 사실과 그해 가을 문제가 제기된 ㄴ교수의 성폭행 사실이 언급되자 기자들의 연락이 몰렸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흰’의 노력은 언론의 조명을 받지 못했다. 경희대 국문과의 피해자는 일찍이 숨어버렸고, 지지자와 연대자들만 남았기 때문이다. 지난 4월19일 만난 ‘흰’의 구성원은 기자에게 “피해자를 연결해드릴 수 없어서 죄송하다”고 했다. 결국 4월27일 ‘흰’은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최근 취재, 홍보 혹은 제보 등으로 연락을 자주 받는다. 그 가운데 무례한 언행을 계속하는 경우가 있어 구성원들의 정신적 피해가 크다”며 “피해자의 신상을 알려달라, 성폭력 사건을 폭로해달라는 취재에는 응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성폭력의 대물림

한겨레21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 대목은 앞으로 #미투 피해자가 더 이상 공개적으로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한국 사회에 ‘지속가능한 #미투’가 가능할까를 되묻게 한다. 피해자 없이 지지자와 연대자들만 남아 제대로 처리되지 못한 교수 성폭력 의혹 사건의 재공론화를 도모하고 크고 작은 성폭력이 문제시되지 않는 대학 내에서 성폭력 문화를 개선하기 위해 싸우는 ‘흰’의 활동에 <한겨레21>이 주목한 이유다.

경희대 국문과는 교수의 권력형 성폭력이 학생들 사이의 일상적인 성폭력으로 재생산되는 성폭력 문화의 구조적 문제를 보여준다. 2016년 문단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 당시 ㄴ교수의 제자로 알려진 한 시인이 다른 대학에서 강의하다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일이 있었다. 교수들의 성폭력 의혹이 공론화된 이듬해인 2017년 선출된 학생회장은 성폭력 가해자로 재판받고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중도 사퇴했다.

‘흰’의 릴레이 대자보가 시작된 지 2주가 지난 4월19일 경희대 문과대학을 찾았다. 2층으로 올라가는 벽면엔 황순원, 조병화 등 한국 문단에 획을 그은 문학인들이 ‘문과대학의 자랑스러운 스승·동문’으로 소개돼 있었다. 그곳에 2006년 성폭력 가해 의혹이 제기되었다가 검찰 무혐의 처분을 받은 적 있는 명예교수의 사진도 붙어 있었다. 당시 검찰은 피해자를 무고 혐의로 기소했고, 이 일은 #미투 국면에서 ‘무고죄 처벌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서 자주 호명됐다. 2016년 경희대 국문과 성폭력 의혹이 터졌을 때, 경희대 학보사(대학주보) 편집장이었던 김도엽씨는 “경희대는 2006년 사건 때문에 교수의 성폭력 문제를 공론화하는 일에 굉장히 보수적이다. 교수 성폭력 일이 터지면 으레 2006년 얘기가 나오면서 신중론이 나온다. 2016년 당시에도 그랬다”고 말했다.

국문과 수업이 주로 이뤄지는 경희대 문과대학 4층 복도의 벽은 2층과는 전혀 달랐다. 학과 내 차별과 혐오를 고발하는 글과 함께 ‘어린 여자아이들은 영원히 어리지 않다. 그들은 강력한 여성으로 변해 당신의 세계를 박살내려 돌아온다’고 쓴 빨간 종이가 마치 레드카드처럼 붙어 있었다. 그리고 릴레이대자보가 #미투의 미래를 질문하는 일임을 알리는 글이 있었다. “(20)16년도 두 교수가 성추행 및 성폭행 가해자로 지목되었다.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늘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대? 이에 대한 해답은 아직까지도 마땅치 않다.”

학생들에게는 여전히 ‘미제사건’인 2016년도 두 교수 사건은 무엇일까. 그해 2월29일 경희대 학생들이 페이스북에서 익명으로 정보와 일상을 공유하는 ‘대나무숲’에 한 교수에게 갑자기 가슴을 움켜쥐이는 추행을 당했다는 글이 올라왔다. 해당 교수에게 1학년 개강파티 때 성추행을 당한 친구의 피해 사례도 함께 적혀 있었다. 또 다른 피해도 폭로됐다. 해당 교수가 개강파티에서 “오빠라고 부르라”며 술을 강권하고, 어깨동무를 하자거나 부축하라고 시키는 등 원치 않는 신체 접촉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경희대의 성희롱·성폭력 관련 징계 양정 기준을 보면, 성추행(기타 성폭력)은 경중에 상관없이 최소 해임이다.

교수는 남성연대를 찾았다

지난 2월 페이스북 대나무숲을 통해 공론화된 명지전문대 연극영화과 교수들의 성폭력 문제는 교육부가 직접 실태조사를 해 남자 교수들을 중징계하라고 학교에 통보했다. 4월 육·해·공군 전투복을 디자인한 국민대 의상디자인과 교수의 2009년과 2010년 성추행 피해 사실은 학교 본부가 해당 교수를 조사한 뒤 이사회에서 해임했다.

그러나 피해자만 3명인 ‘때 이른’ 경희대 #미투의 결말은 허무했다. 가해자로 지목된 ㄱ교수는 현재 소속 학과인 국어국문학과(국문과)에서 정상적으로 수업을 하고 있다. 그의 결백이 명백하게 입증된 결과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ㄱ교수는 완강히 부인했지만, 교내 성폭력 전담기구(경희대 성평등상담실) 등의 객관적인 조사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2016년 10월 문단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 때 경희대 밖에서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ㄴ교수는 검찰의 ‘무혐의’ 처분과 민사소송 승소를 내세워 재론을 막고 있다. 4월18일 릴레이 대자보가 붙은 벽 앞에서 ‘흰’의 구성원들을 만나 인사를 나눌 때 국문과 학과장 ㄷ교수가 나타나 ‘흰’ 구성원들을 불렀다. 학과장을 면담하고 돌아온 ‘흰’의 구성원들은 “글을 내리라고 하신 거지? 안 그러면 고소할 수 있다고?” 등의 말을 주고받으며 얼이 빠진 모습이었다. 학과장은 ㄴ교수가 무혐의 처분 등을 들어 해당 글을 내리지 않으면 명예훼손 등으로 고소할 수 있다고 전했다.

왜 두 교수의 성폭력 의혹은 당사자들의 부인과 해명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재공론화의 압박을 받는 것일까. 성폭력을 문제시하지 않는 일상의 성폭력 문화 속에서 교수의 성폭력 의혹이 부적절하게 무마된 정황이 있기 때문이다. 2016년 2월 국문과 #미투 글이 올라오고 나흘 뒤인 3월3일 ‘교수님을 음해하지 말라’며 #미투를 공격하는 글이 올라왔다. 2010학번이라는 그는 스스로를 “저와 제 친구들은 동아리와 학회를 거의 4년 동안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패장(동아리 대표)이나 학회장을 한 친구들도 많다. 개강파티나 종강파티, 주점에서 교수님들과 함께하는 자리도 많이 가졌다”며 “하지만 이런 소문을 약 5년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활발하게 과 활동을 하며 교수님들과 어울리고 많은 뒤풀이 자리를 다닌 친구들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고 적었다.

페미니즘 소모임 ‘흰’은 2016년 3월 #미투를 공격하는 글이 올라온 배경을 상당 부분 확인하고 있었다. ‘흰’의 구성원은 “제보 글이 올라왔는데도, 일부 남학생들은 해당 교수와 술자리에서 ‘교수님 최고’ ‘나의 스승님’ 하면서 셀카를 찍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렸다. 해당 교수에게서 글을 올린 피해자가 누군지 아냐는 전화를 받은 학생도 있었다. ‘흰’에서 공식적으로 교수에게 질의서를 보냈는데, 전화한 적이 없다고 회신이 왔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있는데, 건 사람이 없다.” 객관적인 조사 기구가 꾸려진 적이 없는 #미투 사건에 대해 학생들의 ‘자체 조사’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당시 상황을 잘 안다는 남자 학생은 “2016년 페이스북 제보 글이 올라온 이후 남자 학생들 사이에서 2차 가해가 너무나 심각했다. 만졌는지 안 만졌는지 어떻게 하냐는 말이 공공연했다. ㄱ교수가 남자 조교에게 연락해서 모일 수 있는 남자 학우들을 모아서 술 한잔하고 싶다고 했고, 그때 모인 자리에서 ‘그거 교수님 아니냐’고 농담하고 그랬다고 한다. 자신과 남학생들의 연대를 확인하려고 만든 자리였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피해자 핑계 대는 대학

한겨레21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술자리를 통해 교수가 학생들을 통제하는 것은 국문과에 매우 일상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적 평가권을 지닌 교수의 술자리는 학생들에게 ‘수업의 연장’이었다. A씨는 “1학년 때 교수님 옆에 앉을 사람을 정하는 선배들이 ‘나 학점 A 받아야 하니까 내가 앉는다’라고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어떤 교수님이랑 외국에 전공연수를 간 적이 있는데, 저녁 식사 자리에서 품에서 소주를 꺼내시더라. 선배들이 ‘이럴 때 잘 마셔야 학점 A 받는다’고 했다. 그래서 다들 즐거운 척 열심히 술을 마셨다”고 했다. 2016년 2월 최초의 미투 제보자도 페이스북 글에서 당시 문제 제기를 바로 하지 못한 이유로 ‘학점’을 들었다. “학점이 나오지도 않은 상태에서 친구를 위해 교수에게 바른 소리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 당사자인 저조차 그게 두려워서 입 뻥끗 못했다. 제가 받는 장학금은 학점 기준이 있다. 학점 걱정을 하지 않으려면 그 교수를 처벌받게 해야 할 텐데, 그럴 자신이 없었다.” 직장에서 벌어지는 권력형 성폭력이 상사의 인사 권한에서 생기는 것처럼, 대학 내 권력형 성폭력은 교수의 평가권에서 생긴다.

특히 술자리가 강조되는 문화 속에서 학생 문화는 자연스레 남성 중심적으로 형성될 수밖에 없다. 2016년 2월에 올라온 최초의 #미투 3건 모두 교수와 함께 술을 마신 개강파티와 종강파티 때 생긴 일이었다. 경희대 국문과의 예비역협의회장이라는 직책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국문과 학생회칙은 예비역협의회의 역할로 국문과 운영과는 무관한 ‘예비역의 사회적 역할을 드높이고 제반 복지 권익을 도모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도 예비역협의회장은 국문과의 의사결정기구인 국문과 운영위원회에 학생회장, 동아리연합회장, 학술연구회연합회장 등과 함께 당연직 위원이다.

교수들은 예비역협의회장을 각별하게 챙긴다. 학과장을 맡고 있는 ㅊ교수는 <한겨레21>과 한 통화에서 “내가 장학금 대상자로 추천해 한 학기에 격려비 조로 10만원 정도를 준다. 복학해서 빙빙 돌지 말고 학과 생활을 잘하라는 뜻”이라고 말했다. ‘흰’의 한 구성원은 “신입생이 60명 되면 남자들은 15명도 안 될 정도로 진짜 적다. 국문과는 여자가 많은 ‘여초과’다. 그런데도 학생회장은 예비역 남자들이 한다. 다른 학과는 16학번들이 학생회장 하는데, 우리 과는 13학번 예비역이다.” 또 다른 학생은 “예비역 남학생들은 술도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잘 마시는 편이고, 예비역 남자에 해당하지 않는 학생들보다는 교수님들과 자주 마신 것으로 알고 있다”고 답했다.

‘흰’의 구성원들은 국문과 여학생으로서 남자 선배들과 하는 술자리에서 겪은 불편한 경험을 여럿 들려줬다. “동아리 술자리 이후 한 남자 선배가 팔로 몸을 누른 뒤 강제로 입을 맞추려 했다”는 이도 있었다. 또 다른 구성원은 “카톡으로 말싸움을 했는데, 갑자기 집 앞에 있으니 나오라고 한 선배가 있었다. 무서웠다”고 했다.

“너희가 걔 인생을 망쳤다 ”

<한겨레21>은 취재 과정에서 2016년 같은 학과에서 무마된 또 다른 #미투가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ㄱ교수 사건이 공론화된 뒤 같은 학과의 ㄴ교수로부터 성폭력 피해를 당했다는 학생이 2016년 3월 성평등상담실에 피해 사실을 상담했다. 상담에 동석했다는 B씨는 5월9일 <한겨레21>을 만나 “ㄱ교수 사건이 페이스북 대나무숲에서 공론화된 뒤 ㄴ교수의 피해자인 C씨 제보를 받았다. 성평등상담실장이 배석한 자리에서 상담이 이뤄졌다”고 말했다. 경희대 홍보팀은 “학생이 2016년 3월 성평등상담실을 찾아 상담한 것은 맞지만, 신고를 원하지 않았다. 성평등상담실에서 공론화해서 추가로 제2, 제3의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설득했지만 피해자가 원치 않았다”고 밝혔다. 이 사건과 관련해 해당 교수는 <한겨레21>에 “본인에 대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피해자를 핑계로 성폭력 의혹을 방치하는 일은 대학 사회에서 흔하다. ㄱ교수 사건도 국문과 교수회는 피해 학생이 원치 않는다는 이유로 진상 조사를 유보했다. 피해자의 신고가 아니면 수사할 수 없었던 성폭력 범죄의 친고죄 규정이 폐지되고 피해자 의사와 무관하게 처벌하게 된 것이 2013년 6월의 일인데도, 대학에서 성폭력은 여전히 피해자 개인이 결단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지난 5월9일 다시 경희대 국문과를 찾았을 때, 한 달 전만 해도 여성혐오 사례에 대한 고발글로 빼곡하던 벽면에 ‘흰’의 2차 가해 논쟁이 한창이었다. ‘흰’이 대자보에서 언급한 2017년 학생회장의 성폭력 가해 혐의 내용과 관련된 피해자라고 밝힌 학생은 공론화 자체가 2차 가해라고 적었다. 그리고 ‘흰’의 구성원들은 기자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3월과 4월 두 차례 인터뷰를 위해 만났을 때 그들이 털어놓은 고립감에 대한 말이 떠올랐다.

“학생 커뮤니티에 가면 국문과 ‘꼴페미과’다, 음기가 너무 세다 이런 말이 있어요.” “‘흰’이 늘 난리를 친다는 이미지가 있어요. 2017년 성폭력 가해자는 학생회장 자격이 없다고 대자보 썼을 때는 국문과 남자 선배들이 ‘너희가 걔 인생을 망쳤다’고 했어요.”

학교가, 교수들이 피해자의 의사를 존중한다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이, 학과에 만연한 성차별, 여성혐오 문화를 개선하는 책임은 오롯이 소모임 구성원들이 떠맡았고 그들은 ‘공공의 적’이 되었다.

진명선 기자 torani@hani.co.kr



권김현영 여성학자 인터뷰





피해자 중심주의의 딜레마





검사, 시인, 비서관, 연극배우…. 지금까지 실명과 신원을 노출한 #미투 피해자 가운데 대학 내 성폭력 피해자는 없다. 대학 내 성폭력은 주로 대리인 또는 지지자, 연대자들이 피해자를 대신해 공론화를 책임지는 일이 많다. 이 과정에서 지지자와 연대자들이 ‘가해자’가 되는 일이 생긴다. 경희대 국문과 페미니즘 소모임 ‘흰’ 역시 피해자로부터 비난받아야 했다. 진짜 가해자는 사라지고 엉뚱한 가해자가 양산되는 아이러니는 왜 생기는가. 지난 3월 출간된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교양인)은 이에 대한 답이다. 책을 엮은 여성학자 권김현영 성공회대 외래교수는 <한겨레21>에 “피해자가 원치 않는다는 이유로 공동체가 피해 사례에 대한 논의를 전혀 할 수 없게 되는 것은 문제”라고 했다.

경희대 사건을 피해자 중심주의와 2차 가해의 오·남용 사례라고 보나.

피해자의 신상을 털어 비난하는 사회다. 당연히 피해자는 사건 공개를 원치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사건 해결 과정에서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면 문제는 계속 반복된다. 공동체가 성폭력 사건에서 배우는 게 있어야 한다.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이름을 가리고, 사건이 특정되지 않게 하는 방법이 있다. 법원이 성폭력 사건의 판례를 비실명으로 처리해서 공개하는 것은 성폭력 문제 처리 기록이 사회적 자산이라는 관점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피해자는 보호받을 권리가 있지만, 피해자가 원치 않으면 조사·기록·공론화 등을 모두 막을 수 있는 권리가 있느냐 하는 건 다른 문제다.

피해자가 원치 않아도 공론화가 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공론장이 맞다. 성폭력은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이므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것이 친고죄 폐지 이유다. 성폭력을 완전히 사회적 문제로 가져가야 한다는 합의가 있었다. 성폭력은 피해자 개인의 피해 복구를 넘어 사회정의의 문제가 됐다는 것이다. 친고죄·반의사불벌죄에선 모든 사건의 공소를 유지하는 데 제일 중요한 조건이 피해자가 되는 게 맞다. ‘피해자가 원치 않으면 사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게 그때 관점이었다. 이건 피해자에게 모든 부담을 전가하는 일이다. 피해자에게 공론화 여부를 맡기는 것은 법 개정과도 맞지 않다. 피해자에게 사건과 관련해 질문하는 것을 피해자 중심주의에 어긋나는 2차 가해라고 규정하는 것도 과도하다.

성폭력을 공론의 장에서 말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

성폭력 피해 경험을 말하고 공론화하는 과정에서 성적 수치심을 느끼는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이 드러나고, 무엇이 성폭력인지에 대한 상식이 생긴다. #미투가 그렇다. 한샘 사건을 비롯해 #미투 때 공론화되고 설명된 성폭력 피해 사실을 보면서 무엇이 성폭력인지 알 수 있다. 1999년 남녀차별금지법 등 성폭력을 금지하는 제도가 완비된 뒤에도 공론화는 잘 되지 않았다. 성폭력 사례가 풍부하게 축적되지 않은 것이다. 바로 거기에 그동안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는 규범이었던 피해자 중심주의와 2차 가해의 딜레마가 있었다. 피해자 중심주의와 2차 가해 때문에 피해자를 과보호하고, 피해자를 대신 얘기해줘야 하는 대상으로 만든 것이 문제다. 이 교착상태를 돌파한 것이 결국 #미투라는 피해자의 직접행동주의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2006년 성폭력 가해 의혹이 제기됐으나, 검찰에서 무혐의 처분을 내리고 피해자가 무고로 기소된 경희대 ㅅ명예교수 사건 등 성폭력 문제 공론화의 실패 사례도 있다.

여러 가지로 불행한 사건이다. 하지만 그것을 통한 교훈은 공론화를 하지 말아야 한다가 아니라, 피해자를 도와야 한다며 필요한 질문을 하지 못했던 무모한 피해자 중심주의에 대한 것이다. 지지자들은 피해자를 보호하고 지원하는 사람이지, 피해자를 무조건 믿어야 하는 사람이 아니다. 실수하지 않기 위해 무엇을 배워야 하냐가 핵심인데, 모든 게 차단돼 슬프다.

#미투에 걸맞은 새로운 피해자 보호 담론이 나와야 한다는 말로 들린다.

그렇다. 1994년 사무직 여성에게 성적 불쾌감을 느끼는 사례를 조사했다. 그때 ‘음란한 눈빛’이라는 대답이 제일 많이 나왔다. 음란한 눈빛이 성폭력이다, 라는 규정은 무의미하다. 어떤 상황과 맥락에서 음란한 눈빛으로 성희롱이 일어나는지 알게 해줘야 한다. #미투가 그런 점에서 굉장히 힘이 세다. 한국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구체적인 성폭력 사건을 알게 된 거고, 의견을 갖게 된 거다.







독자  퍼스트  언론,  <한겨레21>  정기구독으로  응원하기!



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공식 SNS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

Copyrights ⓒ 한겨레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겨레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