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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6 (목)

교육과 사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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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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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시계'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 말은 칸트가 늘 일정한 시간에 습관적으로 산책을 한 것에서 비롯된 말이다. 칸트뿐만이 아니다. 삶의 문제를 놓고 씨름했던 많은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산책을 즐겼다. 한 가지 이유였다. 삶을 어떻게 살 것이냐의 문제를 성찰하기 위해서였다. 예수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부처는 중생의 생·노·병·사 문제를, 소크라테스 역시 인간의 문제를 놓고 고뇌했다. 사색의 본질은 자신의 삶을 자신의 삶답게 살기 위한 성찰이다. 가진 것이 많다고 해서 삶이 풍요로워질 수 있을까. 지식이 많다고 해서 그 삶이 아름다울 수 있을까. 명예가 있고 지위가 높다고 해서 그 삶이 멋지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고, 지위가 높고, 명예를 얻었다고 해도 그 기저에 사색을 기초로 한 삶의 주춧돌이 없다면 그 재물과 지식과 명예를 지탱하기 어렵다. #사색은 '자기 목적적 동조'의 바탕 실제로 사색은 우리의 삶을 질적으로 변화시킨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흔히 "잘난 자식은 나라의 자식이고 못난 자식만 내 자식"이라는 말을 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 속에는 중요한 의미가 숨어 있다. 자식이 자신의 역할을 잘해 세계의 자식이 되고 나라의 자식이 되지만, 가까이에서 언제나 쉽게 볼 수 있는 못난 자식만 못하다는 역설적인 이야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사색을 통해 이런 사실을 깨달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사색을 통해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 사색은 사소하지만 그 작은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인간이 삶에 대한 가치를 부가시켜 준다. 그렇지 않다면 삶은 늘 비극이고 불만족의 연속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예는 수없이 많다. 상대적으로 가진 것이 많고 지식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거나 현실을 부정하는 경우는 대표적이다. 『공부의 철학』을 쓴 지바 마사야에 의하면, 진짜 공부란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남의 말과 행위에 뇌동하지 않게 되는 것, 경우에 따라서는 '저 사람 재수 없어' 라는 말을 듣게 되는 것"이다. 어떤 의견에 대해 '좋아요'를 누르는 것에 주저하게 되고 주류적인 생각에 딴 소리를 하는 이상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는 것. 하지만 깊이 공부하다보면 주변에 동조했던 그런 자신은 사라지고 어느덧 자기 자신에게 동조하게 되는 '자기 목적적' 동조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깊은 공부는 단순히 지적인 깊이가 깊은 공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바 마사야가 언급한 자기 목적적 동조로 가는 것이 깊은 공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색 없이는 깊은 공부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사색을 통해 자기만의 생각과 다듬어진 자기 목소리를 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식이 깊은 공부는 남들을 가르치고 과학문명을 발달시킬 수 있는 공부지만, 나만의 깊은 공부는 나를 풍요롭게 하고 나를 깊게 만드는 자기 목적적 공부인 셈이다. #때론 '재수 없다'는 소리를 들어도 한병선 교육평론가·문학박사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인간의 삶을 가장 풍요롭게 만들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교육은 사색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은 틀림없다. 왜 오늘날의 교육이 영혼 없는 교육으로 비판을 받는가. 그럼에도 다행스러운 것은 최근 미래교육에 대한 논의에서 '영성'이란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영성은 가르치는 교육을 통해서는 결코 효과를 거둘 수 없는 영역이다. 이 영역은 바로 사색활동과 가장 밀접한 관련성을 갖는다. 바람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닌 '바람 소리를 보는 것', 비가 오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닌 '비가 오는 것을 느끼는 것'이 사색의 본질일 수도 있다. 이를 알게 하는 것이 진정한 교육의 가치다. 더 정확히 말하면 교육의 진정한 가치는 사색에서 온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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