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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8 (금)

후손들 욕망에 포위된 ‘쌍릉’ 주인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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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형석의 시사문화재]

무왕? 선화공주? 청주 한씨 시조?

인골상자 발굴 뒤 무덤 주인 두고

이해 얽힌 지자체·문중 관심 고조


한겨레

발굴조사 뒤 내부 석실 얼개가 드러난 쌍릉 대왕묘. 치밀하게 판축된 봉분과 정연하게 판석이 맞물림된 구조의 석실 입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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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봐도 확실한 백제 왕릉입니다.”

무덤 속을 엿본 고고학자들은 이론이 없었다. 권력자의 관이 들어갔던 돌방(석실)은 모양새가 서릿발처럼 근엄했다. 여섯군데로 각진 공간을 품은 석실은 정연한 구획선으로 백제왕가의 위세를 드러냈다. 거친 화강암은 두부 자른 듯 매끈한 석판으로 다듬어져 석벽을 이루었다. 천장 고임석 돌표면의 자연무늬조차 똑같이 짝으로 나뉠만큼 벽면의 좌우 대칭은 딱 맞아떨어졌다. 합판처럼 반듯하게 다듬고 정성껏 물갈이까지 해놓은 석실 표면도 눈길을 붙들었다. 관을 놓은 바닥의 돌판 위에는 옛 부장품에서 떨어진 듯한 금박이 반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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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세기 만에 재발굴된 익산 쌍릉 대왕묘 석실 내부. 정교하게 다듬어진 관 받침대와 꼼꼼하게 맞물린 천장 판석과 고임돌 얼개 등에서 명백한 왕릉급 고분임을 실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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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요> 연애담의 주인공인 백제 무왕(재위 600~641)과 신라 선화공주가 각각 묻혔다는 설이 전해져온 신비의 두 무덤, 전북 익산의 ‘쌍릉(국가사적)’이 요즘 문화재동네에서 부쩍 자주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시내 석왕동 숲속에서 작은 무덤 ‘소왕묘’와 사이를 두고 마주보는 큰 무덤 ‘대왕묘’를 1917년 일본학자 야쓰이 세이이쓰가 처음 조사한 지 100년만에 재발굴해보니 수십여점의 인골이 든 상자가 발견됐다는 발표가 지난달 나와 큰 주목을 받았다.

세간의 호기심은 인골이 과연 무왕이냐 아니냐에 쏠렸다. 하지만, 고고학 전문가들은 이 무덤의 뛰어난 얼개와 만듦새에 더욱 놀라워한다. 인근의 국내 최고 석탑인 미륵사터 서탑보다도 더욱 정교하게 가공된 석재를 치밀한 수법으로 엮어 석실을 만들었고, 치밀하게 흙층을 다져 5m의 봉분을 쌓은 판축 무덤이란 사실이 백제 고분 가운데 최초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한반도의 주요 유적들을 발굴한 일본의 고고학 거장 아리미쓰 교이치는 이미 70년대 야쓰이의 100년 전 발굴결과를 토대로 쌍릉에 대한 분석 자료를 내놓은 바 있다. 쌍릉 규모가 백제 말기 왕릉급 고분들인 부여 능산리 고분군보다 큰 왕릉급임은 학계에 알려져 있었다. 중요한 건 과거 야쓰이가 발굴한 실제 무덤 속 현장을 100년만에 다시 노출시키면서 백제인들이 쌓은 봉토의 실체를 확인했다는 점이다. 층층마다 탄탄하게 흙다짐을 한 대왕묘 봉토의 단면은 비슷한 시기 익산 제석사 목탑터 땅 밑 기초부분에 백제장인들이 다져넣은, 우람하고 아름다운 판축층을 당장 떠올리게 했다. 그동안 백제 고분의 봉토는 후대인들이 두툼하게 쌓아올린 것이며 백제인들이 실제로 쌓은 봉토는 남아있지 않다는 국내 학계의 통설은 이번에 확실히 깨졌다.

야쓰이 이래 처음 무덤 방에 들어온 고고학 전문가들은 무덤 안 석실의 위엄서린 분위기, 돌가공의 정교함, 전례 없이 확인된 봉토의 판축기법 등에서 쌍릉이 익산의 유일한 왕릉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됐다. 발굴을 이끈 원광대 마한백제연구소의 최완규 소장은 “고고학은 논리학”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서동요>나 미륵사 창건설화 기록 등으로 익산과 깊은 인연을 쌓은 백제 통치자는 무왕이 유일하다. 규모, 축조가공 기법, 재료 등에서 명백한 왕릉인 대왕묘 주인은 무왕일 수밖에 없다.”

고고학자 입장에서 남이 오래 전 팠던 무덤을 다시 파는 건 달가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재조사를 결행한 건 익산시의 절박한 의지가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야쓰이의 발굴 유물과 자료들을 갖고있는 국립전주박물관이 2016년 야쓰이의 조사 100년만에 쌍릉 발굴보고서를 내면서 내비친 ‘선화공주 매장설’이 도화선이 됐다. 그가 대왕묘 출토품으로 전해준 치아 2개가 20~30대 젊은 여성의 것이고,석실 안 바닥에서 발견된 토기도 신라계라는 박물관 보고서의 분석내용은 큰 파장을 일으키며 선화공주가 쌍릉의 주인일 것이란 담론을 만들어냈다. 무왕을 지역이 배출한 역사적 위인이자 자부심의 원천으로 여기는 익산시로선 상실감이 컸다. 무왕의 실체라고 믿어온 쌍릉의 정체성이 무너져 버릴 위험에 처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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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실 안 북서쪽 모서리의 도굴 구멍. <고려사 절요>에 도굴기록이 남아있어 고려시대 도굴꾼이 뚫은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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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릉의 왕릉 실체가 처음 드러난 이번 발굴을 기점으로 선화공주설은 재반박되고 있다. 박물관의 치아분석은 육안감정에 의지한 것으로 과학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백제시대 유물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근거가 약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또다른 근거인 신라 토기는 익산 미륵사터나 부여 등의 백제 유적에서도 출토사례가 보고됐을 뿐 아니라 대왕묘 석실에 고려시대 도굴구멍 두 군데가 확인돼 심지어 고려 토기일 가능성까지 제기된다. 실제로 <고려사 절요>에 쌍릉에 대한 도굴범을 적발했다는 기록까지 전해져 논란은 더욱 흥미롭게 비친다.

쌍릉 주인 논란은 후대의 해석을 놓고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다. 익산과 부여는 무왕의 연고권을 놓고 비슷한 이름의 축제까지 벌이며 십년 이상 갈등을 빚어왔다. 쌍릉을 문중의 시조 마한왕의 능으로 보고 오래 전부터 무덤 앞에서 제례를 치뤄온 청주 한씨 문중도 무덤주인 논란에 예민하다. 그래서인지 인골의 성별 분석을 맡은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섣불리 분석에 착수하지 못하고 법의학자 등 여러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는데 집중하는 낌새다. 새로운 팩트가 계속 생성되고 지자체, 문중간의 미묘한 갈등과 욕망도 뒤엉켜서 쌍릉 미스터리는 앞으로도 흥미진진한 일화들을 계속 쏟아낼 것으로 보인다. 익산/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마한백제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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