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재심 청구…4개월 만에 무죄
검찰 상고로 대법원 2년째 심리 중
대법에 빠른 판단 세번 요청했지만
판결 미루는 사이 지병 악화돼 숨져
유족 “좋은 소식 못 듣고 가셔 억울”
1979년 부마민주항쟁 당시 시위대의 모습.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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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신속하게 피고인의 명예회복을 위한 조치를 해야 합니다. 명예회복의 첫 단계는 기결수 신분에서 하루속히 벗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검사의 상고를 기각해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김영일씨는 지난해 9월 변호인을 통해 자신의 재심 사건을 심리하는 대법원에 ‘빠른 판단을 내려달라’는 의견서를 냈다. 김씨 사건은 2016년 10월 대법원 3부(주심 김재형 대법관)에 배당됐다. 김씨는 올해 2월과 3월에도 같은 내용의 의견서를 제출했다. 김씨의 간절한 바람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지병이 있던 김씨는 지난 4일 재심 판단을 보지 못하고 예순네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박정희 유신정권의 종말을 앞당긴 부마민주항쟁은 1979년 10월에 일어났다. 당시 부산·마산·창원지역 시민과 학생이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에 나서자, 박정희 정권은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진압에 나섰다. 박찬긍 부산지역 계엄사령관은 “유언비어 날조·유포와 국론분열 언동을 엄금한다”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당시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부산경남지방 간사였던 김씨는 인권침해 상황을 조사하러 부산에 온 손학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운동 간사(현 바른미래당 중앙선거대책위원장) 등에게 “데모 군중이 반항하면 발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번 데모에서 총소리가 났다”는 유언비어를 유포한 혐의(계엄법 위반)로 재판에 넘겨졌다. 1981년 대법원은 그에게 징역 2년을 확정했다.
김씨는 2013년 제정된 ‘부마항쟁보상법’의 특별재심 규정을 근거로 2016년 5월 재심을 청구했다. 부산고법 형사1부(재판장 김주호)는 넉달 만에 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김씨가 유언비어를 유포하려 한 게 아니고 ‘그런 이야기가 있지만 신빙성이 없거나 사실과 다르다’는 의견을 전달한 것에 불과하다”고 무죄 이유를 밝혔다. 재판부는 한발 더 나아가 김씨의 유죄 근거가 된 포고령 자체가 죄형법정주의 등 헌법에 위반돼 무효라고 지적했다.
명예를 회복했다는 기쁨은 잠시였다. 검찰은 당연하다는 듯 재심 결과의 부당함을 주장하며 대법원에 상고했고, 김씨는 ‘최종 무죄’를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아버지가 몸이 안 좋으셨지만 젊은 시절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것을 인정받고 싶어 재심을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투병 중에도 ‘법원에서 연락이 왔느냐’고 물어보곤 하셨는데, 재판이 지연돼 좋은 소식을 듣지 못하고 가셔서 억울하고 아쉽습니다.” 김씨의 딸은 13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자식으로서 진한 아쉬움을 드러냈다. 김씨의 변호를 맡은 이상희 변호사는 “35년을 기다려 재심 무죄 판결을 받은 김씨에게 대법원이 늑장 심리로 또다른 피해를 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대법원은 “이 사건은 계엄포고령의 위헌·무효 여부가 쟁점으로, 아직 대법원이 계엄포고령의 위헌·무효를 선언한 선례가 없어 관련 법리 등을 심층 검토 중이다. 조속한 처리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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