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남의 시로 가꾸는 정원] [11] 봄볕

봄볕

내 거짓말 왕궁의 아홉 겹 담장 안에 김치 속 속배기의 미나리처럼 들어 있는 나를

놋날 같은 봄 햇볕 쏟아져 내려 육도삼략(六韜三略)으로 그 담장 반나마 헐어,

내 옛날의 막걸리 친구였던 바람이며, 구름, 선녀 치마 훔친 뻐꾸기도 불러, 내 오늘은 그 헐린 데를 메꾸고 섰나니……

―서정주 (1915~2000)

추위 견디던 참담한 회색빛 정원의 물건들이 이제 다들 제 물색을 갖추어서 치렁치렁합니다. 곧 붉은 장미가 담장을 둘러 피어나면 오월 녹음의 난만함도 붉은빛을 더해 적당히 긴장할 겁니다. 이 찬란한 때에는 뜰에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저 깊이깊이 숨겼던 부끄러운 일들, 모습들 다 내놓아 하늘에 보이라고 타이르듯이 봄볕은 날마다 소곤댑니다. 남북이니 동서니 하는 냉랭했던 모든 것들도 나서라는 시절입니다. 구중궁궐도 모자라 뒤뜰 독 안의 배추김치, 그 포기 속의 미나리처럼 숨은 ‘나’를 봅니다. 봄볕 아래 눈썹 그림자 짙게 늘이고 생각해 봅니다. 봄볕의 그 ‘참다움’에 혹은 거짓도 있었을 나를 허물어야 비로소 ‘나’이지요. 그 허물어진 데를 가리며 서야 하는 우리 모두의 안쓰러움도 봅니다. 그나마 독작(獨酌) 고독의 친구들이 바람이며 구름이며 뻐꾸기 소리 같은 맑은 것들이어서 다행입니다.

[장석남 시인·한양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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