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후 겪은 고통 절절히 담아
1623년 한산도 주민 11명이 백성들의 고충을 덜어 줄 것을 청원한 ‘한산도민 등장(等狀)’. /조완제씨 소장 |
'옛날의 1000여가구가 점점 흩어져서 300여가구에 지나지 않으니, 애달픈 이 섬의 백성은 삶의 근거를 보존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임진왜란 종전(終戰) 25년 후, 한산대첩의 승전지였던 한산도는 피폐해 있었다. 1623년(광해군 15년) 1월 한산도 주민 11명이 통제사에게 올린 청원서 '한산도민 등장(等狀·여러 사람이 이름을 써서 관청에 하소연함)'이 발굴됐다. '교감완역 난중일기'를 냈던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은 최근 임진왜란 때 고성 현령을 지낸 조응도의 후손 조완제씨가 소장한 이 문서를 찾아내 본지에 공개했다.
청원서에는 당시 한산도 주민들이 겪고 있던 고통이 절절히 기록돼 있다. 주민들은 한산도의 관아와 내륙 두룡포(지금의 경남 통영)의 삼도수군통제영 사이에서 온갖 진상(進上·지방의 토산물 등을 바치는 일)과 요역에 시달리고 있었다. 한산도에선 붉은 해삼 6종을 진상하고, 전선(戰船)을 만들 목재를 끌어 운반하고, 강을 굴착하는 일을 했다. 두룡포에서는 생전복과 익힌 전복 6종을 진상하고, 전선 8척을 물로 끌어내는 일에 동원됐다.
통제영에서 치러졌던 무과 별시(別試)의 급제자들도 민폐 요인이었다. 이들은 마을을 돌며 놀거리를 찾아다녔고, 승려들이 공문을 빙자해 폐단을 만드는 일도 있었다. 매년 700~800냥에 이르는 잡다한 세금 징수 역시 백성을 괴롭혔다. 이 때문에 주민들이 다른 곳으로 떠나 인구가 예전의 30%로 줄어들었다. 청원서는 '제대로 된 절목(지침)을 만들어 백성의 고통을 덜어 달라'고 호소했고, 문서 끝에서 통제사는 '규정 외의 강제 징수는 엄하게 금지하겠다'고 밝혔다.
박성호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문헌관리학과 교수는 "지금까지 민간에 전래된 고문서들이 대부분 양반가 문서였던 것과 달리 과중한 세금과 요역에 시달렸던 조선시대 기층민들의 실상을 보여 주는 자료"라고 말했다.
[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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