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6.26 (수)

[friday] 맹수의 걸음처럼 느긋하지만 날카롭게 입맛 당기는 힘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정동현의 지금은 먹고 그때는 먹었다]

해운대 터줏대감 '신흥관'

조선일보

60년 넘은 해운대 중국집 ‘신흥관’의 깐풍기. 고기를 썰고 베고 튀기고 볶아낸 과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 정동현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해운대는 이제 미래 도시다. 2003년 개통된 광안대교는 바다를 가로질러 부산의 동과 서를 이어 붙였다. 그 뒤로 건설사의 조감도에 나올 법한 고층 건물들이 해변에 들어섰다. 해변에는 호텔들이 장수처럼 진을 쳤고 그 뒤로는 모텔들이 병졸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다. 비가 오면 진창이 되던 해운대 시장도 계획도시처럼 정비했다. 고등학교 시절, 답답하면 버스를 타고 놀러 오던 해운대. 힘이 뻗쳐 고함을 지르며 뛰어놀고, 수능시험을 앞두고 친구들과 밤을 새우며 누워 있던 그곳 백사장에서 변함없는 건 바다와 하늘뿐인 것 같다. 그곳에 60년 넘은 중국집이 있었다. 1954년 영업신고를 한 해운대에서 가장 오래된 음식점 '신흥관'이다.

해운대구청 입구, 오토바이와 사람들이 싸우는 연인처럼 뒤엉킨 그곳에 옛 글자체로 적힌 간판이 보이면 제대로 찾은 것이다. 월요일 영업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주의하자. 부산 음식점치고 명절에 영업하는 곳이 없다는 것도 알아둬야 한다. 그런 날만 빼면 늘 문을 열고 객(客)을 맞이하는 이곳은 그 역사치고 규모가 크지 않다. 그러나 세월은 크기로 증명되지 않는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원조'라고 소리 높여 외치지 않아도, 높은 빌딩을 세우지 않아도 알게 되는 시간이 느껴진다.

"서울에서 오셨나 봐요?"

큼지막한 카메라를 보고 여주인이 알은척을 했다. 부산에서 자란 시간보다 서울에서 버티고 또 버틴 시간이 더 길어버려, 더는 부산 사람이라고 우길 수도 없었다. 하늘은 새파랬고 이른 점심 중국집에는 갓 썬 양파의 상큼하고 단 기운이 병아리같이 따스한 기운에 전해 왔다.

여주인은 거리낌 없이 이를 드러내며 입과 눈으로 웃었다. 식사부와 요리부로 나뉜 메뉴판에는 하나같이 친숙한 요리들이었다. 몇 개를 골라 주문을 넣었다. 한국말은 중국말이 되어 주방에 전해졌고 뒤이어 달그락 달그락 중화 프라이팬 웍(wok) 돌리는 소리가 났다. 잠시 뒤 여주인은 깐풍기와 작은 종이 상자를 들고 왔다.

깐풍기에서 뜨거운 김이 올라왔다. 기름, 간장, 고추, 파가 열에 달구어져 고소하고 매콤하며 달달한 풍미가 애교를 피우듯 코를 간질였다. 나는 소풍을 앞둔 어린애 같은 기분이 들었다. 큼지막한 깐풍기를 베어 물었다. 옅은 단맛과 신맛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맛의 윤곽을 잡고 매콤한 기운은 그 윤곽에 채색을 하듯 맛의 형태를 만들었다. 신맛은 어렵다. 이 집 깐풍기에 어울린 신맛은 맹수의 걸음걸이처럼 느긋했지만 날카롭게 입맛을 당기는 힘을 숨기고 있었다. 이에 물리는 닭고기의 양감과 이에 스치는 뼈의 질감에 이 음식이 단순한 고깃덩어리가 아니라 누군가가 어떤 생명체를 썰고 베고 튀기고 볶아낸 과정이 느껴졌다. 다 먹고 난 뼈를 종이 상자에 넣었다. 이 집에서 직접 오리고 만든 종이 상자였다.

"식사도 드릴까요?"

깐풍기를 거의 다 먹고 주위를 둘러보던 중이었다. 왕년의 홍콩 배우 '홍금보'와 이곳 주인이 찍은 사진이 눈에 띄었다. 여주인은 내 말을 듣고 곧 사천짜장과 간짜장을 내왔다. 고춧가루, 고추기름으로 맛을 낸 사천짜장은 보기에도 매워 보였다. 그러나 입에 넣으니 맵기보다는 달콤하고 또 달콤하기보다는 시큼한 맛이 강했다. 첫맛은 익숙지 않았지만 먹을수록 맛이 혀에 달라붙었다.

기름에 튀기듯 부친 달걀 프라이와 강낭콩이 올라간 간짜장을 보니 부산에 온 것이 실감 났다. 춘장을 넣고 되직하게 볶은 간짜장에는 단맛이 적었다. 대신 발효된 장의 간간하고 구수한 향내가 더 크게 느껴졌다. 아삭하게 씹히는 양파와 좀스럽지 않게 들어간 고기를 씹으며 면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위장 속에서 올라오는 음식 냄새는 하늘을 날며 칼 한 자루와 의리 하나로 세상을 구할 것 같던 홍콩 영화 속 풍경처럼 연기가 흩날리고 피 같은 단맛이 흘렀으며 아련한 신맛이 풍겨왔다.

이 집을 나오며 수많은 정치인과 연루되었다는 빌딩이 올라가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바빌론의 탑 같은 그 빌딩에서 눈을 돌려 이 작고 낮은 집을 바라봤다. 그곳에 무너지지 않았고 무너지지 않을 시간의 탑이 쌓여 있었다.

#신흥관: 간짜장 7000원, 사천짜장 7500원, 짬뽕 7000원, 탕수육 2만2000원(중), 깐풍기 3만원. 부산 해운대구 중동1로. (051)746-0062

[정동현 음식칼럼니스트]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