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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6 (수)

시골 장터로 김밥 배달하던 '얼굴없는 神父'를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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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계 화제의 책 '성당지기…' 사제의 삶 기록한 익명의 신부

두유 배달·부부 신자에 반지 선물 "신자들 위한 '성당지기' 되고파"

저자가 정체를 꼭꼭 숨긴 책 한 권이 천주교계에서 화제다. 지난해 11월 출간된 '성당지기 이야기'(성바오로출판사). 5개월 만에 3쇄 6000부를 인쇄했고, 팟캐스트 '수도원 책방'에 소개되며 신자들 사이 조용한 물결을 일으키고 있다.

책에 적힌 저자 이름은 'SSP'. 200여쪽 책을 다 읽으면 저자를 추리할 수 있는 몇 가지 단서는 있다. 독실한 가톨릭 집안 막내로 태어나 신학교 졸업 후 프랑스 리옹과 이탈리아 로마에 유학했으며 귀국 후 시골 성당 주임신부를 거쳐 신도시로 온 50대 중반의 사제다.

조선일보

/일러스트=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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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채화풍 에세이로 읽히는 책을 펼치면 인기의 비결을 바로 느낄 수 있다. '양(羊) 냄새 나는 목자(牧者)'로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사제를 발견할 수 있어서다. 시골 성당 주임 시절 저자는 새벽 4시에 일어나 성당 난방을 켜놓은 후 승합차를 몰고 마을 어르신들을 새벽 미사에 실어날랐다. 신자들은 농사지어 5일장에 팔아 생계를 잇는 이가 대부분. 장날이 주일과 겹치면 미사에 못 온다. 신부는 새벽에 장터를 찾아 신자들에게 따뜻한 두유와 김밥을 배달했다.

성당에 속한 공소(公所) 중엔 한센인 공동체가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방문할 때마다 분위기가 냉랭했다. "커피 한 잔 주세요" 하면 신자들이 난처해하며 "커피 드셔도 되겠어요?" 물었다. 신부가 자신들을 멀리 한다고 짐작한 것. 신부는 한센인 공소를 매주 방문했고, 매월 마지막 주엔 한센인들을 성당으로 초대해 함께 미사를 올렸다. 어느 날 신부의 휴대전화에 모르는 번호로 문자메시지가 왔다. '씬부님, 싸랑합니다. 항상고맙듭니다.' 한센병으로 손가락을 잃은 신자가 손등으로 글자판을 눌러 쓴 메시지였다. 한번은 신자들이 신부에게 '돌침대'를 선물하고자 모금했다. 신부는 그 이야기를 듣고 '다른 이벤트'를 꾸몄다. '혼인 갱신식'. 부부 신자들을 성당으로 불러 모아 각자 사랑 고백을 하게 하고, 돌침대 대신 은반지를 마련해 그들 손에 끼워 드렸다.

신도시 아파트로 둘러싸인 가건물 성당으로 옮긴 신부는 또다시 일을 벌였다. 신부들에겐 '휴일'인 월요일 저녁에 공부 모임을 만들었다. 성경 읽기, 성경 필사에 이어 예수님이 직접 화법으로 말씀하신 구절 필사 운동을 시작했다. 텅 비었던 성당에 점점 신자들이 늘었다. 고마워서 선물을 하기로 했다. '장궤(長跪)틀' 즉 '기도 의자'다. 시간 나는 대로 나무를 자르고 깎고 다듬어 252개의 '기도 의자'를 만들고 측면엔 '하느님과 당신이 만나는 자리'라는 글귀를 새겼다.

SSP 신부가 소중하게 간직하는 것은 한센인의 문자 외에도 '버스표 10장'이 있다. 20여년 전 사제품을 받고 보좌 신부로 지내던 어느 날, 집에 들렀다 성당으로 가려 할 때 어머니가 '어떻게 가겠느냐' 물었다. "택시를 타거나 신자의 차를 얻어타고 가지요. 왜요?" 그러자 어머니는 '사제 서품 선물'이라며 버스표 10장 한 묶음을 내놓았다. "아들 신부님은 버스 타고 다니시오. 신부님이 만나는 신자들 대부분이 버스 타고 다닌다오." 게으른 마음이 일 때마다 그는 버스표를 꺼내본다. 신자들에게 대접 받고 가르치려는 사제가 아닌 '성당지기'가 되려 다짐한다. 성바오로출판사의 한 신부는 "자신을 드러내기 싫어하셔서 약속하고 책을 냈다"며 "신부들이 꼭 읽어야 할 책"이라고 했다.



[김한수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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