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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 (금)

“여성을 출산수단으로 보는 저출산 정책 재설계해야” 여가부의 뒤늦은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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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출생아수가 1970년대 통계 작성이래 처음으로 35만명대를 기록했다. 여성 1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수를 뜻하는 합계출산율도 1.05명으로 역대 최저 기록을 세웠다. 사진은 지난달 28일 서울 시내 한 산부인과 병원 신생아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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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저출산 정책이 여성을 ‘인구 정책의 대상ㆍ수단’으로만 다루고 있어 계획을 전면 재설계할 필요가 있다는 여성가족부의 권고가 나왔다. 하지만 저출산 정책 수립에 참여한 여가부가 때늦은 비판을 제기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제기됐다.

여성가족부는 ‘제3차 저출산ㆍ고령사회기본계획(2016~2020)’에 대한 2017년 특정성별영향분석평가 결과 이러한 내용을 기본계획 수립 총괄부처인 보건복지부에 권고했다고 12일 밝혔다.

특정성별영향분석평가는 여가부가 매년 정부의 주요 정책과 법령을 양성평등 관점에서 분석ㆍ검토한 뒤 문제점 개선을 권고하는 제도다. 개선권고를 받은 부처는 한달 이내에 개선계획을 수립하고, 이듬해 법률개정, 예산반영 등 개선결과를 제출해야 한다.

여가부는 “3차 기본계획의 목표가 ‘출산’ 자체에 집중돼 있어, 아동을 출산하는데 필요한 ‘모성건강’만을 강조하고 여성의 생애주기에 따른 재생산 건강권에 대한 고려는 미흡하다”며 “현재의 기본계획은 임신ㆍ출산 전ㆍ후에 발생하는 의료적 상황에 대한 지원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고 지적했다. 재생산 건강권은 임신ㆍ출산 뿐 아니라 강제ㆍ차별ㆍ폭력으로부터의 자유를 포함한 성적 속성과 연관된 문제에 대해 자유롭고 책임 있게 결정할 권리를 말한다.

또 “3차 기본계획의 핵심목표인 ‘합계출산율’(2020년 1.5명)에는 여성은 ‘당연히 출산해야 하는 존재’라는 전제가 반영된 것”이라며 “임신ㆍ출산지원 분야의 성과지표로 제시한 임신유지율(전체 임신 건수에서 실제 출산으로 이어진 비율) 또한 출산율 제고를 위해 여성의 재생산을 관리ㆍ규제하는 국가주의적 시각에 기반을 둔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에 따라 여가부는 “일차적인 임신ㆍ출산 지원에서 한발 더 나아가 ‘남녀 생애주기 전반의 재생산 건강권 증진을 위한 과제’를 마련해 기본계획에 반영할 것”을 권고했다. 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에 비해 현저히 높은 모성사망(임신ㆍ출산 관련 사망)을 줄이기 위한 정책 방안을 마련하고, 난임 부부의 의료ㆍ심리 지원을 위한 맞춤형 상담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공식 가이드라인을 개발할 것도 권고했다.

여가부는 3차 기본계획이 여전히 사실혼을 배제한 ‘법률혼’을 전제한 제도들이 유지되고 있는 점도 문제로 꼽았다. 아이를 둔 사실혼 관계의 부부는 행복주택 등 신혼부부 대상 주택 지원 제도의 혜택을 받을 수 없고, 동거 부부의 경우 아빠는 육아휴직을 쓸 수 없도록 한 점 등을 사례로 들었다. 그러면서 비혼 출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이 같은 가족 지원 정책에서의 차별적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비혼 출산에 대한 포용적 분위기 형성과 정책적 지원을 기본계획의 핵심과제로 추진하고,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 등을 실시하고, 인공임신중절에 따른 여성 건강권 확보 방안 등 실질적 정책수요를 파악하도록 권고했다.

하지만 여가부가 뒤늦게 3차 기본계획을 비판하고 나선데 대해선 논란의 여지가 있다. 현재 추진되고 있는 3차 기본계획은 박근혜 정부 시절 만든 것이다. 여가부는 당시 3차 기본계획 마련에 참여했다. 일ㆍ가정 양립, 미혼모 정책, 영유아 양육 지원(아이돌봄서비스), 다문화 가정 지원 등 저출산 정책 실행의 상당 부분을 여가부가 담당하고 있기도 하다.

정책 수립에 참여해 양성평등적 관점에서 목소리를 내야할 여가부가 그동안 침묵하고 있다가 이제 와서 스스로 비판하는 모양새가 됐다.

3차 기본계획 수립에 참여했던 이삼식 한양대 행정학과 교수는 “저출산 기본계획 수립 주무 부처는 복지부이지만, 정부 합동 기본 계획인 만큼 여가부 역시 정책 수립에 참여했다”며 “기본계획에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반영하는 것은 건전한 방향이지만 정책 수립단계에서 의견을 제시해줬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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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26일 청와대에서 제6기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간담회에 앞서 위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문 대통령은 "지금이 심각한 인구위기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마지막 골든타임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테이블 왼쪽부터 정영애 서울사이버대 부총장, 김상희 부위원장, 문 대통령, 조소담 미디어 닷페이스 대표, 임윤옥 한국여성노동자회 상임대표. [청와대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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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황우정 여가부 성별영향평가과장은 “3차 기본계획만이 잘못됐다기 보다는 그간 우리나라 저출산 정책이 여성을 어떻게 하면 출산할것이냐에집중하다보니 정말 중요한 전반적인 문제를 다루지 못했다. 이제는 여성의 삶 전반의 건강 문제에 대해 다룰 필요가 있다는 문제 제기를 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여가부 권고의 근거가 된 ‘저출산ㆍ고령사회 기본계획 특정성별영향분석평가’ 보고서를 작성한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6년 1차 저출산기본계획이 만들어졌지만 2008년 정권이 바뀌면서 대폭 수정됐다. 이때 저출산 정책에서 ‘성평등’ 관점이 아예 사라졌고, 지난 9년간 이어졌다”며 “너무 늦었지만 이제라도 정부 저출산 정책의 비전을 성평등 사회로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여가부의 권고의 대안이 없다는 지적도 나왔다. 인구학자인 조영태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출산을 할 수 있는 것은 여성이고, 합계 출산율이라는 개념은 전세계가공통적으로 사용하는 것인데 이를 폐기하면 어떤 지표를 목표로 잡을 것인지 대안이 없다”라고 말했다. 조 교수는 “성평등 관점에서 좋은 인구 정책이 뭔지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성평등만 중요하고 인구는 중요하지 않다는 비판을 위한 비판에 그칠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동욱 복지부 인구정책실장은 “지난해 12월 새로 구성된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의 가장 큰 목표가 일ㆍ생활 균형을 통해 삶을 개선한다는 것이다. 출산을 여성문제로 바라보기보다는 국민의 삶 자체를 나아지게 하자는 것이다. 위원회는 3차 기본계획을 이러한 목표에 맞춰 조정할 것인데 여가부의 권고 사항 또한 반영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여가부는 검사ㆍ경찰의 교육과정과 관련해서는 성폭력, 가정폭력 등 여성폭력 범죄 수사과정에서의 2차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검찰청과 경찰청에 권고했다.

수사과정에서 피해자에 대한 진술 강요, 범죄와 관련 없는 질문, 신상 노출, 가해자와의 대질신문 등 2차 피해에 대한 우려가 신고를 더욱 기피하게 한다는 분석에 따른 것이다.

여가부는 “현재 검찰과 경찰에서 피해자 보호와 관련된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지만, 교육대상자가 소수로 한정되어 있고 의무교육도 아니라는 점에서 효과성이 높지 않다”고 지적하면서 수사업무 종사자 교육에 여성폭력 통합 대응사례 교육, 성인지 교육 등을 신설ㆍ강화하고, 경찰대학의 교양필수 과목에 양성평등 의식 제고를 위한 내용을 반영할 것, 재직 경찰에 대해서도 여성폭력 2차 피해 예방을 위한 교육을 강화할 것 등을 권고했다.

이에스더 기자 etoil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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