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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9 (수)

[TOPIC] 근로시간 단축 보완책 탄력근로제 여전히 ‘깜깜’ 기술·시장 변화 대응 탄력근로제 확대 불가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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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이코노미

국회가 주당 법정근로시간을 52시간으로 단축하는 근로시간 단축 법안을 통과시켰지만 재계가 주장해온 탄력근로제 확대 방안이 빠져 논란이 크다. 사진은 국내 자동차 공장 생산라인 모습. <기아자동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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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가 근로시간 단축을 위한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처리하면서 재계가 대혼란에 빠졌다. 당장 ‘주 52시간 근무’를 일괄 적용할 경우 특정 시기에 일감이 몰리는 업체들은 제때 생산 물량을 납품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부작용을 보완하기 위해 재계에서는 탄력근로제 확대를 줄기차게 요구해왔지만 끝내 법안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다. 기존에 실시해온 탄력근로제조차 노동계 반발이 커 재계는 속으로 끙끙 앓는 분위기다.

▶‘탄력근로 준비’ 부칙에 넣었지만

▷구체적 적용 기간 빠져 노사갈등 우려

국회는 지난 2월 28일 주당 법정근로시간을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단축하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본회의에서 통과시켰다. 그러면서 개정안 부칙 3조에 “고용노동부 장관은 2022년 말까지 탄력적 근로시간제의 단위 기간 확대 등 제도 개선 방안을 준비한다”는 조항을 넣었다. 그동안 경영계가 요구해온 탄력근로제 기간 확대를 부칙에 포함시키기는 했지만 정작 명확한 기간을 정하지 않았다. 제도 개선 시기도 ‘2022년 말’로 못 박아 사실상 이번 정부에서는 탄력근로제 확산에 나서지 않겠다는 의미로 해석돼 논란이 뜨겁다.

근로기준법 51조에 포함된 탄력근로제는 근로시간을 법정근로시간 이상으로 늘릴 수 있는 제도다. 근로시간을 일일, 일주일 단위로 엄격하게 지키는 것이 아니라 탄력적으로 근무시간을 조절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번 근로기준법 개정으로 주 최대 근로시간은 법정근로 40시간과 연장근로 12시간 등 총 52시간으로 줄었다. 이때 탄력근로제가 적용되면 최대 60시간으로 늘릴 수 있다. 단 탄력근로제 적용 기간의 평균 근로시간은 연장근로를 포함해 주 최대 52시간을 초과할 수 없는 만큼 나머지 기간에는 평균치보다 적게 일해야 한다. 예를 들어 2주 단위 탄력근로제가 적용되면 첫 주에 58시간 일할 경우 다음 주에는 46시간 이하로 근무해야 평균 52시간을 맞출 수 있다.

현행 제도에서는 탄력근로제 단위 기간을 2주나 3개월 이내로 정하는 것만 허용된다. 기간이 워낙 짧은 탓에 그동안 탄력근로제를 이용하는 기업이 별로 없었다. 그나마 기업 마음대로 탄력근로제를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취업 규칙으로 정해야 2주, 노사가 서면으로 합의해도 3개월 이내로만 가능하다. 이를 두고 경영계에서는 노조 동의 요건 등을 완화하고 적용 기간도 6개월~1년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일례로 신제품 출시를 앞둔 IT 업계나 에어컨 등 계절 가전제품 생산 현장에서는 최소 6개월 이상 집중적으로 근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건설업체들도 장마철이나 겨울에는 공사를 진행하기 어려워 다른 시기에 업무를 몰아서 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하지만 이번 합의안 부칙에는 경영계가 요구해온 탄력근로제 확대 방안만 애매하게 담겼을 뿐 구체적인 기간은 정해지지 않아 탄력근로제 도입이 쉽지 않은 분위기다.

매경이코노미

▶탄력근로제 두고 노사 첨예한 입장 차

▷경영계 “1년까지 확대” vs 노동계 “수당 준다” 반대

탄력근로제가 정착되지 않은 상황에서 근로시간만 단축할 경우 재계는 대혼란에 빠질 전망이다. 당장 초과근무 의존도가 큰 제조업체 입장에서는 인건비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한국경제연구원은 ‘주 52시간 근무제’가 실행될 경우 기업이 현재 생산량을 유지하기 위해 추가로 부담해야 할 비용을 연간 12조1000억원으로 추산했다. 이 중 71%(8조600억원)는 근로자 300인 미만 중소기업 부담이다.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개정안에 공휴일 유급화가 포함된 것도 부담이다. 구인난에 시달리는 영세 중소기업으로서는 양질의 인력 확보도 쉽지 않다.

그동안 중소기업계에서는 ‘30인 미만 영세사업장의 경우 주 8시간의 특별연장근로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해왔지만 이 역시 법안에 포함되지 못했다. 중소기업중앙회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에 대해 “휴일에도 쉬기 어려운 서비스업 종사자나 인력이 부족한 소기업의 비용 부담을 초래할 수 있어 유감”이라고 밝혔다. 경기도에서 기계 부품 제조업체를 운영하는 A대표는 “지금도 양질의 인력을 구하기 어려운데 최저임금이 올라가고 근로시간까지 줄이면 더 이상 경영을 유지하기 어렵다.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릴 수 있다지만 정치권이 중소기업 경영난 실상을 전혀 모르는 것 같아 걱정”이라고 털어놨다.

이 때문에 재계에서는 근로시간 단축이 정착하려면 탄력근로제 활성화가 절실하다고 주장한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근로시간 단축의 연착륙을 위해 탄력적 근로시간제 등 유연근무제를 활성화해야 한다. 불가피한 연장근로가 필요한 경우 예외 조항을 신설하는 등 보완입법이 마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도 노동계는 여전히 탄력근로제 확대에 부정적이다. 당장 수당이 대폭 줄어들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현행 탄력근로제에서는 집중 근무 기간의 허용 한도인 주 48시간에서 법정근로시간 40시간을 뺀 8시간은 연장근로로 인정받지 못한다. 예를 들어 첫 주에 48시간을 근무하고 다음 주에 32시간을 일해 평균치가 법정근로시간(주 40시간)에 못 미치면 첫 주에 일한 8시간을 초과근무로 보지 않는다는 의미다. 노동계는 또 적용 기간을 1년으로 늘릴 경우 6개월간 집중적으로 연장근로를 시키고, 일이 적은 나머지 6개월에는 임시 단기직을 고용하는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전문가들은 근로시간 단축으로 인한 혼란을 줄이려면 탄력근로제를 확대 시행하면서 노동생산성을 높여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실제로 선진국들은 탄력근로제를 비롯한 유연근무제를 도입해 근로시간 단축 부작용을 줄인 경우가 많다. 독일,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은 탄력근로제를 1년 단위로 운용하면서 성수기에 집중적으로 일하고 비수기에 휴가를 사용한다. 독일은 ‘근로시간 저축계좌제’까지 도입했다. 근로자가 자신의 근로시간을 초과해 일한 만큼 저축해놨다가 휴가가 필요할 때 꺼내 쓰는 제도다. 프랑스도 연장근로는 업종이나 기업별 협약으로 정하는 예외 규정을 뒀다.

탄력근로제 시행과 함께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것도 절실하다. OECD에 따르면 한국 근로자의 시간당 노동생산성(2016년 기준)은 33.1달러로 미국(63.3달러)의 절반 수준에 그친다. OECD 국가 평균치(47.1달러)에도 한참 못 미친다. 재계는 근로시간 단축을 논의하면서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방안도 함께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국회에서는 이런 의견이 전혀 반영되지 못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최근 “노동시간 단축은 일자리를 늘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기대했지만 생산성 향상 방안 없이 고용 증대로 이어지기 어렵다는 분석이 많다. 생산성이 낮은 상황에서 근로시간만 줄이면 기업 경쟁력이 떨어지고 고용 감소, 실업률 악화 악순환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우광호 한국경제연구원 부연구위원은 “근로시간을 단축해 부족 시간만큼 고용이 창출된다는 주장은 현실과 괴리가 크다. 단순 업무는 오히려 기계 대체 속도가 빨라지고 특수한 지식·기술이 필요한 산업도 파트타임 근로자 고용으로 현재 업무를 대체하기 어렵다. 부작용 우려가 큰 만큼 산업별로 근로시간 단축에 따른 피해를 최소화하는 맞춤형 대책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김경민 기자 kmkim@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949호 (2018.03.14~2018.03.20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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