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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7 (월)

[사진오늘] '파란만장', 권력의 중심과 끄트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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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2일에는 이런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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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 전시'의 흥선대원군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흥선대원군 이하응.

조선말 쇄국정치를 펴며 최소 10여 년간, 정치를 쥐고 흔들었습니다. 공(功)과 과(寡)가 뚜렷한 만큼 평가도 뚜렷이 갈리는 인물입니다. 난감했던 조선말의 역사 앞에 선 난감한 인물입니다.

혼돈했던 당시처럼 '풍운아'로 살다간 흥선대원군은 1898년 2월 22일 타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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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장례식 [연합뉴스 자료사진]



'파락호(破落戶)', '대원군(大院君)', '섭정과 실각', '대립과 복귀'.

19세기 후반 격변하는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조선말 정치의 한복판에 섰던 그의 이력을 요약하면 위와 같습니다. 흔히 하는 표현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파락호.

세도정치를 편 안동 김씨 권력가들의 눈에 재목 있는 왕족들은 수시로 제거 대상이었습니다. 끊임없이 견제당하는 왕족의 일원이었던 이하응은 건달에 무뢰한으로 위장한 '파락호' 행세를 했습니다. 이면에는 음모와 술수를 숨겼습니다.

대원군.

파락호 행세 와중에도 은밀히 조대비(趙大妃)에 줄을 댔습니다. 후사 없이 사망한 철종의 왕위 계승자로 자신의 둘째 아들 이명복이 되도록 꾸몄습니다.

아들이 고종에 오른 뒤 그는 왕의 아버지인 '대원군'에 올랐습니다. 역사상 왕이 즉위할 때 살아있던 대원군으로는 처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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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의 생일기념 사진 [사진가 이해선]



'섭정과 실각'.

10여 살 정도의 어린 나이의 고종을 대신해 섭정하면서 시정잡배 시절 보고 느낀 조선의 문제점들을 정책에 반영해 나갔습니다. 세제개혁, 서원철폐, 인재등용, 비변사 폐지 및 의정부 부활 등의 개혁정책을 실현했습니다.

그러나 왕권 강화 명분으로 실시한 무리한 경복궁 재건, 서구와 단절한 쇄국정치, 천주교 박해 등의 정책은 세계사 흐름을 바로 보지 못한 대표적인 실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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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양요(1871년) 때 강화도를 공격한 미국 콜로라도호 [연합뉴스 자료사진]



섭정 10년 후 어엿한 청년이 된 고종은 결혼 후 맞은 명성왕후와 함께 아버지 대원군으로부터 권력을 넘겨받았습니다. 1873년 고종의 친정 선언으로 강제로 은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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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거행된 15세 고종과 16세 명성왕후의 가례 재현 [연합뉴스 자료사진]



'대립과 복귀'

기회만 되면 정계복귀를 노리며 끊임없이 아들 내외와 대립합니다. 명성왕후 일파인 민 씨 일가가 잡은 정권을 찾아오기 위해 집착에 가까운 노력을 기울입니다. 임오군란(1882) 때는 잠시 정권을 잡기도 했으나 청나라의 간섭으로 청에 끌려가 유폐되기도 했습니다.

이후 갑오농민전쟁(1894), 을미 사변(1895), 아관파천(1896) 등의 사건에 개입해 정권 획득을 위한 노력에 눈을 떼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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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운현궁 [연합뉴스 자료사진]



정치의 중심과 끄트머리를 오가던 그는 1898년 오늘, '격변'의 시대에 '격정'의 삶을 마칩니다. 78세였습니다.

서울 종로구 창덕궁 인근에 보존된 운현궁은 그의 사가(私家)였습니다. 고종도 여기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서화에도 능했던 그는 특히 난초를 잘 그렸습니다.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로운 난초의 뻗침. 그와 닮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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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응의 '병란도(甁蘭圖)' [연합뉴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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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남양주시 화도읍의 흥선대원군 묘 [연합뉴스 자료사진]



doh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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