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D.C.에서 가장 사랑받는 기념관인 링컨 메모리얼은 강건한 도리아 열주 양식이 인상적이다. 민주주의의 발상지인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을 닮았다. 민주주의와 자유에 기여한 링컨의 업적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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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통령 중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하고, 가장 인기 있는 사람을 꼽으라면 누구일까? 링컨이다. 그렇다면 능력이라는 측면에서는 어떨까? 현실에서나 역사에서나 유명세와 인기는 실력이나 인품과 별개인 경우가 많다. 링컨은 그런 점에서도 특별하다. 그는 언제나 전문가들이나 학자들이 꼽는 위대한 대통령 1~2위에 들어간다.
이런 링컨의 위상은 워싱턴 내셔널 몰에 있는 링컨 메모리얼(Lincoln Memorial·링컨 기념관)에서도 잘 드러난다. 워싱턴 기념탑을 중심으로 백악관과 토머스 제퍼슨 기념관이 대칭을 이루고 링컨 기념관은 국회의사당과 마주 보고 서 있다. 제퍼슨 기념관보다 더 크고 더 높은 곳에 위치한 링컨 기념관은 워싱턴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몰리는 곳이다.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와도 미국 전역에서 아니 지구촌 방방곡곡에서 몰려오는 관광객으로 언제나 북적인다.
링컨의 기념관은 제퍼슨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신전을 닮았다. 제퍼슨 기념관이 로마 판테온 형식에 우아한 이오니아 열주 양식을 따랐다면 링컨의 그것은 그리스 아테네의 파르테논 형식에 강건한 도리아 열주 양식이다. 제퍼슨 기념관에 비해 훨씬 간결하지만 힘이 있어 보인다. 이 링컨 기념관으로 오르는 계단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인다. 계단 한편에 앉아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얼마나 다양한 인종과 민족의 사람들이 이 땅에 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이 보이는 행태도 다양하다. 오래 머물며 생각에 잠기는 사람도 있고 활짝 웃으며 휴대폰으로 인증샷만 찍고 떠나는 이도 있다. 포옹한 채 얘기를 나누는 남녀가 있고 아이들에게 열심히 설명을 해주는 부모들도 있다. 그 모두의 눈앞에 거대한 링컨의 좌상이 놓여 있다는 것만이 공통점이다.
무엇이 이토록 많은 사람들을 이곳으로 잡아끄는 것일까? 아니, 링컨의 어떤 점이 이토록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일까?
링컨은 ‘격동’이라는 표현조차 부족한 ‘극단의 시대’를 살았다. 그는 미국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인 내전을, 지금까지 미국이 겪었던 전쟁 중에 가장 인명 피해가 컸던 최악의 전쟁을 대통령 재임 동안 치러냈다. 일부는 링컨 스스로가 그 전쟁의 원인이었다고 비난한다. 대부분은 링컨이 그 전쟁으로부터 미국을 구원했다고 말한다. 어쨌거나 링컨은 북부의 대통령으로서, 북군의 총사령관으로서 최악의 전쟁을 수행해야만 했다.
그 와중에 링컨은 수많은 연설과 편지를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우기 위해, 희망을 전달하기 위해,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아마 링컨은 2차 세계대전을 수행했던 루스벨트 대통령과 더불어 가장 많은 메시지를 던진 미국 대통령일 것이다.
그가 던진 그 많은 메시지 중 무엇이 가장 중요할까? 미국인들은, 이 거대한 신전을 지은 사람들은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들은 두 개의 메시지를 뽑았고 신전의 벽면에 깊이 새겼다. 링컨의 좌상을 바라보며 왼쪽에 새겨놓은 게티즈버그 연설문과 오른쪽에 새겨놓은 2차 대통령 취임사가 바로 그것이다. 거대한 공간 안을 장식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전부다.
링컨 메모리얼을 찾는 수많은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 링컨의 위엄 있는 동상. 그 위로 연방을 내전으로부터 구해낸 링컨의 업적이 새겨져 있다. |
링컨과 메시지. 링컨은 무엇을 말했던 것일까? 미국인들은 링컨을 통해 무엇을 기억하려는 것일까?
에이브러햄 링컨은 1809년 12월 2일 켄터키주 호젠빌 인근 통나무 오두막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가난한 개척농이었다. 어머니는 링컨이 아홉 살 되던 해에 죽었다. 그러나 링컨은 흙수저로 태어난 것을 원망하지 않았고 자신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그는 독학으로 공부해 변호사가 됐다. 장사에 실패해서 큰 빚을 졌지만 결국에는 다 갚음으로써 신용을 잃지 않았다. 여러 차례 낙선했지만 정치의 꿈을 포기하지 않아 일리노이주를 대표하는 연방하원 의원이 됐다.
링컨이 정치가로 성장하던 시기는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그 원인은 노예제도로 대표되는 남부와 북부의 차이였다.
그 차이점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산업구조와 문화적 토대였다. 남부는 식민지 건설 초기부터 대농장 중심의 농업과 귀족 문화를 바탕으로 했다. 북부는 중소자영농과 수산업, 상공업 등 다양한 산업을 바탕으로 좀 더 평등한 문화를 발전시켜왔다.
양측 갈등은 계속 격화됐지만 해결책은 나오지 않았다. 정치 리더들의 보신주의와 책임 회피가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그 결과 남부와 북부는 전쟁이란 최후의 수단에 기댔다. 노예 문제에 대해 명확한 소신을 가진 링컨이란 대통령의 등장이 도화선이 됐다.
링컨은 합법적이고 순차적인 방법으로 노예제의 확산을 막고 근절시키려 했으나 이미 불가능했다. 남부는 연방 탈퇴를 선택했고 전쟁이란 카드를 뽑아들었다(1861년 4월 12일). 링컨은 연방의 대통령으로서 헌법을 수호하고 연방을 지키겠다는 자신의 맹세를 지켜야만 했다. 전쟁은 모두의 예상과 기대를 깨고 길어졌고 막대한 피해를 냈다. 60만명 넘는 사람이 죽었다. 전쟁의 결정적인 전환점은 게티즈버그 전투(1863년 7월)였다. 같은 해 11월 19일 용사들을 위해 조성된 묘지를 봉헌하기 위해 게티즈버그를 찾은 링컨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연설 중의 하나를 했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가 지상에서 결코 소멸되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다짐하는 바입니다.’
연설은 파격적으로 짧았다. 267개 단어에 불과했다. 그러나 메시지는 명확했고 울림은 깊었다. 누구도 민주주의를 이처럼 간단하게, 그러나 명확하게 표현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재선에 성공했으나 취임 며칠 후인 1865년 4월 14일 워싱턴의 포드 극장에서 총에 맞았다. 다음 날 아침 링컨은 영면했다.
그는 위대한 유산을 남겼다. 미국이라는 나라를 지켜냈고 노예제를 미국 땅에서 폐지시켰다. 더욱 중요한 유산은 민주주의와 관용이다. 게티즈버그 연설문에서 링컨은 민주주의의 요체를 밝혔다. 미국인들은 그 연설문을 신전의 왼편에 새겼다. 1865년 3월 4일 링컨은 두 번째로 대통령에 취임했다. 취임사는 게티즈버그 연설보다는 길었지만 짧기는 마찬가지였다. 703개 단어에 불과했다.
‘With malice toward none, with charity for all, (…) to bind up the nation's wounds (…)(누구에게도 악의를 품지 말고 모두에게 관용을 베풀자).’
링컨은 이 연설을 통해 민주주의를 뛰어넘는 보편적인 진리를 말했다. 미국인들은 이 취임사를 신전의 오른편에 새겼다. 위대한 리더와 그렇지 못한 리더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역사는 답을 준다. 미래와 관용이다. 링컨은 ‘나는 항상 자비가 엄격한 정의보다 더욱 풍성한 결과를 낳는다고 믿는다’는 말을 해왔다. 그는 말을 팔지 않았다. 그는 뱉은 말을 지켜왔다.
평범하거나 수준 낮은 리더들로 인해 지쳐 있다면, 민주주의와 더 나은 미래에 대한 답을 잃고 방황하고 있다면 링컨 기념관은 반드시 방문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이곳에서 그를 보고, 그가 남긴 두 연설을 읽는 것만으로도 치유가 된다.
[송동훈 문명탐험가·㈜송동훈 대표이사]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945호·설합본호 (2018.02.07~2018.02.20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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