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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7 (월)

[헌법 11.0 다시 쓰는 시민계약]인공호흡기 단 환자 ‘최고령’ 카운트다운 도중 정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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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트로 엿본 생명권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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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벤드’

*ABEND (abnormal end): 비정상종료, 프로그램이 정상적으로 완료되지 못하고 일어나는 종료. 독일어로는 저녁이라는 뜻이며 ‘아벤트’로 발음한다.


8월9일 오후 8시9분. 잠시 감고 있던 눈을 떴을 때는 이미 그 시각이 지난 후였다. 나는 시계를 재차 확인하고 나서야 차문을 열고 나왔다. 8월9일은 내 생일이다. 그리고 8시9분은 내가 ‘생일 시, 생일 분’으로 부르는 시각이다. 이로써 8월9일의 남은 4시간 정도만 조용히 지나가 준다면 나의 생일과 관련된 숫자들이 모두 과거가 될 참이었다. 초침이 없는 시계를 차기 시작한 것도 8분9초까지 신경 쓰며 살다가는 당장에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아무튼 그 순간 나는 올해의 최대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했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42년을 살아오면서 8월9일 그리고 8시9분, 8, 9, 89 같은 숫자들이 조합되면 내겐 늘 무언가 좋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곤 했다. 특히 혼자 있을 때는 더욱 그런 일이 잦았다. 10시 교대근무를 앞두고 2시간이나 일찍 회사로 나간 것도 모두 그 8월9일 때문이었다.

지하주차장에서부터 로비에 이르기까지 병원 건물 전체가 수많은 취재진으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그 뜨거운 열기에 에어컨이 정상 작동되고 있나 하고는 본능적으로 주변을 확인할 정도였다. 아무튼 전 세계까지는 몰라도 대한민국의 모든 이목은 확실히 우리 병원을 향해 있었다. 보이지 않는 그 열기를 측정할 수 있다면 새로운 최고기온 기록이 세워질 것 같았다. 우리 병원의 환자 한 명이 오늘 밤 자정을 넘기면 ‘세계최장수인’의 기록을 세우게 된다고 했다.

그는 19세기에 태어나 여태 생존해 있는 마지막 사람이다. 1897년 9월17일생으로 확인된 그는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기간이지만 조선시대를 산 인물이기도 하다. 얼마 전 그의 정확한 나이와 출생기록이 정부로부터 공식인정을 받기도 했다. 그가 태어난 해 이웃에 살던 외국인 선교사가 찍어준 사진 속에 우연처럼 놓여 있던 ‘독립신문’ 한 장이 이를 증명해 주었다. 사실 정부의 공식인정으로 인해 오늘의 이 북새통 같은 일이 시작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어떻든 그는 대단히 오래 살고 있었다.

병원 곳곳에 임시로 폐쇄된 구역들을 피해 오느라 지하 3층에 자리 잡은 사무실까지 도착하는 데 평소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2시간 가까이 일찍 출근한 야간근무자를 동료직원은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이곳은 병원 전체의 전력을 관리하는 통합관제실이다. 새로운 시스템이 갖춰지고 1년쯤이 지나자 이제는 눈을 감고 있어도 모든 기계장치들의 정상신호가 머릿속에 그려진다. 사무실의 조명을 낮추자 나의 조용한 밤이 시작되었다. 그 수많은 초록 불빛의 깜빡임은 마치 수억년의 밤하늘을 비추고 있는 별자리와 같았다. 계절에 따라 변하는 별자리와 1년 내내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별자리가 있는 것처럼, 이곳의 전력신호도 365일 24시간 거의 변함이 없는 응급전력과 계절에 따라 변화가 심한 일반전력으로 나뉘어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전기 신호들 중에서 내가 태어난 사자자리를 그려보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어차피 별자리라는 게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인간이 마음대로 이어 붙이고는 이야기를 보탠 것에 불과한 것처럼 말이다. 어쨌든 만약 내가 어느 천문대에 취직해 밤하늘을 관찰하고 있다면 우주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작은 변화도 가장 먼저 발견할 것이 틀림없다. 무언가 변화를 인지하는 일에는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다. 방송장비들을 위한 전력사용은 일반전력의 평균사용량을 5% 정도 증가시키는 데 그쳤다. 눈으로 직접 수치를 확인하지 않아도 나는 그 깜빡임의 간격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자정이 가까워 오자 병원 관계자는 물론 이 역사적인 순간을 전국으로 생중계하기 위한 방송사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TV 화면에서는 9분59초를 시작으로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책상 위에 놓인 스마트폰 화면의 볼륨을 조금 높였다. 하나 이번 이벤트를 둘러싼 논란이 없지는 않았다. 아직 생존이 정확히 확인되지 않은 사람을 두고 이런 선정적인 이벤트를 준비한 병원과 방송사들에 대한 비난 여론이 인터넷을 중심으로 쏟아졌다. 병원 측은 이러한 여론을 의식했는지 보건복지부 직원을 통해 그의 생존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다만 그 담당 공무원은 “현재 그는 입원치료 중에 있는 것으로 안다”라는 모호한 한마디를 했을 뿐이다.

5분을 남기고 화면 속에 드디어 주치의가 등장했다. 그는 환자의 상태에 대해 브리핑했다. 최근 치료과정에서 건강상태가 악화되어 잠시 인공호흡기의 도움을 받고 있지만, 자가 호흡 사인을 동반하고 있으며 동공 및 피부 자극에 대한 반응도 정상적으로 보이고 있어 뇌사 상태는 아니라고 강조하였다. 아무튼 그가 죽지 않았다는 말을 굉장히 어렵게 하고 있었다. 나는 화면 가까이로 몸을 조금 당겼다. 다만 TV 화면의 카운트다운을 통해 나의 8월9일이 지나가는 순간순간을 의식적으로 확인해야 하는 일이 조금 불편했다.

1분을 앞두고 드디어 병실 창을 가리고 있던 커튼이 서서히 걷히고 드디어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분명히 죽어 있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기대만큼 활기차 보이지도 않았다. TV 화면 속의 카운트다운 숫자와 인공호흡기의 그래프 사인이 묘한 리듬감을 만들고 있었다. 나에게는 그 기계장치의 깜빡이는 불빛이 가장 크게 다가왔다. 주치의 옆에는 아들로 보이는 한 남자가 함께 서 있었다. 그가 최고령자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그 역시도 몹시 늙고 힘들어 보였다.

의사의 눈짓에 곁을 지키고 있던 아들이 그에게 다가갔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지그시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모든 방송사 카메라들이 일제히 클로즈업을 담기 시작했다. 온 세상이 숨을 멈춘 듯 고요했다. 나 역시 그 순간만큼은 그 거대한 긴장에 동참하고 있었다. 10, 9, 8, 7…….

정적. 그리고 암흑.

마지막 카운트다운이 진행되던 순간 갑자기 TV 화면이 사라졌다. 함께 나의 지하 사무실의 비상 경고음도 요란하게 울렸다. 정확히 말해 화면송출이 중단된 것은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정전으로 병원 전체가 순간적인 암흑상태가 된 것이었다. 사실 여기까지는 내가 그날 이후 TV와 인터넷 등을 통해 보고 들어 알게 된 내용이 보태진 것이다.

나의 우주에도 빅뱅이 발생했다. 찰나의 시간에 모든 별자리가 뒤엉켜 새로운 우주를 만들었다. 내가 처음 경험하는 신호들의 향연이었다. 그 어떤 변화의 조짐도 없었다. 나는 정신없이 비상발전기의 가동을 확인했다. 양쪽 눈 밑이 파르르 몹시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병원의 전력시스템은 비상사태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고 자신에게 입력된 프로그램대로 차분히 전력을 복구해 나갔다. 나는 이를 지켜보며 모니터링을 하고 수동으로 리셋해야 할 것들을 매뉴얼에 따라 처리해 나갔다.

제일 먼저 수술실과 중환자실의 전력이 복구되었다. 30초가 채 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이어 응급실과 실험실 그리고 일반 병동에까지 복구시스템은 그렇게 차분히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모든 전력이 제자리를 찾기까지 3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나에게는 46억년 같은 시간이었다. 그 순간 문뜩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드디어 8월10일이 되었구나.

경향신문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동시에 비상콜이 들어왔다. 17층 입원실의 전력이 회복되지 않았다는 연락이었다. 그래 17층. VIP 병동은 아직 오픈 전이라 비상전력이 연결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수동연결. 곧바로 정상신호가 들어왔다. 수화기에서 17층이라는 말이 들리고 뒷얘기를 듣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내 손은 움직였다. 이 또한 찰나의 순간이었다. 길을 잃은 마지막 별자리 하나가 제자리를 찾았다. 역시 8월10일의 나는 어제와는 달랐다.

이 역시 나중에 확인한 내용이지만 모든 병실에 전력이 회복되던 3분의 시간 동안 전력중단으로 인한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다. 다만 VIP 병동은 예외였다. 5분 만에 전력이 회복된 병실은 전력이 복구된 뒤에도 거대한 침묵이 이어지고 있었다. 인공호흡기의 사인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 끈질긴 깜빡임은 유성처럼 우주의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TV 화면 속의 그 무거운 공기가 지하 3층인 내 사무실까지 내려와 닿는 듯했다.

사고 한 달 후 나는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기소되었고 유가족으로부터는 손해배상 소송에 휘말렸다. 공소장에 적힌 사건발생일은 8월9일이었다. 그의 사망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8월10일이었지만 그가 ‘세계최장수인’의 새로운 기록을 세우지 못한 것을 보면 사건은 분명 8월9일에 발생했다고 말했다. 나는 어떤 이유에서든 살아있는 사람을 죽게 만들었다고 했다. 그것도 세상에서 가장 오래 살 뻔한 사람을 말이다.

<정영호 | 독립영화감독·광운대학교 외래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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