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0.06 (일)

[최보식이 만난 사람] "백악관 연설 담당이 '당신이 트럼프라면 어떤 연설 하겠나?' 했을때…"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트럼프 방한 당시 국빈 만찬에 초청받은… '꽃제비' 출신 이성주씨]

'청와대'라며 전화 걸려와 보이스피싱으로 여겨 끊자

'미국 측에서 초청해 당신에 대해 잘 모르니…'

"인천공항에 도착했을 때도 중국의 한 도시인 줄 알아

'남조선'이라는 걸 알고는 '되돌려 보내 달라'고 빌어"

작년 11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방한 당시 청와대 공식 만찬에 각계 유력 인사들과 함께 한 탈북 청년이 초청됐다. 지금까지 국빈(國賓) 만찬에 탈북민 참석은 처음이었다. 주인공은 '꽃제비' 출신 이성주(31)씨였다. 국내 탈북민 3만여 명 중에서 그가 왜 어떻게 초청됐는지는 설명이 없었다. 우리 사회가 탈북자 얘기에 식상해졌기 때문인지 모른다.

하지만 지인의 소개로 우연히 이 청년을 만났는데, 내게 뜻하지 않은 '발견'의 기쁨을 줬다.

"저를 만찬에 초청한 쪽은 한국이 아니라 미국이었습니다. 주한 미 대사관에서 전화를 걸어와 '트럼프 대통령에게 하고 싶은 말이 없느냐'고 묻기에 제 생각을 말했습니다. 대사관에서 '직접 만나면 얘기해 보라'고 했습니다. 내가 어떻게 만나겠나 속으로 생각했지요. 그날 오후 '청와대'라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보이스피싱으로 여겨 끊었더니, 다시 전화가 왔습니다. '미국 측에서 초청해 당신에 대해 잘 모른다. 신상 조회를 해도 되겠느냐'고 했습니다."

당시 미국 측 초청 명단 52명 중에 한국인이 두 명 포함됐다. 무역업 종사자와 그였다. 북한에서 '꽃제비'로 살았던 그의 스토리를 담은 '에브리 폴링 스타(Every Falling Star·한국어 번역본 제목은 '거리 소년의 신발')'가 재작년 말 출간된 것도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 책은 미국 학부모협회의 '권장도서상 은상'을 받았다.

조선일보

이성주씨는 “한국이 탈북민을 구출해 정착금 주는 것은 국가의 책임을 다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지호 기자


―청와대 국빈 만찬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나요?

"만찬장에 입장하면서 양국 대통령 부부와 악수할 수 있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보고를 받았는지 '멋있게 잘 큰 것 같다'고 격려해줬습니다. 트럼프 대통령과 악수할 때는 제가 영어로 '시진핑 주석을 만나면 중국에 억류된 탈북민이 석방되도록 꼭 말씀해주십시오'라고 하자, '알겠네, 젊은이'라고 했습니다."

만찬장 테이블에서 그의 옆자리는 트럼프의 연설문을 담당하는 백악관 공보팀 소속 젊은 여성이었다고 한다.

"그분은 제게 궁금한 게 많았습니다. 다음 날 예정된 트럼프의 국회 연설문을 손보는 중이라며, '당신이 트럼프 대통령이면 어떤 연설을 하고 싶나'라고 물었습니다."

―뭐라고 답했나요?

"저는 '절대로 북한 선제 타격을 말하지 말라. 한국인의 반응이 안 좋다. 북한 정권을 아프게 하는 방법은 한국과 북한을 비교하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와 독재라는 가치 싸움을 하라'고 말했습니다. 다음 날 국회에도 초대받아 트럼프 대통령의 연설을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우리에게 트럼프의 이미지를 바꾼 명연설이었습니다. 한국 대통령보다 한반도 상황의 본질을 잘 아는 것 같았습니다. 성주씨가 도움이 된 것 같군요.

"원래 연설 원고를 못 봤으니 모르겠습니다. 제가 그렇게 말 안 해도 다 알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북한 호위국 소속 소좌(소령)였다. 1994년 김일성 사망 직후 술자리에서 했던 체제 비판적 발언이 당국에 적발됐다. 평양에 살던 그의 가족은 함경도 경성으로 하방(下放)됐다. 굶어 죽는 주민들이 속출하는 '고난의 행군' 시기였다.

1998년 아버지는 '중국에 건너가 돈을 마련해 오겠다'며 떠난 뒤 소식이 끊겼다. 그러자 어머니가 식량을 구하러 원산에 있는 여동생 집으로 떠났다. '배고프면 물을 마시되 소금을 꼭 챙겨 먹어라. 일주일 뒤 돌아오겠다'는 편지 한 장 남겨 놓고. 그렇게 떠난 어머니는 행방불명이 됐다.

―어떻게 열한 살짜리 아들을 혼자 남겨두고 부모가 다 떠날 수 있는지?

"부모를 줄곧 원망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먹을 것이 떨어진 북한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했습니다. 버려진 아이들은 장마당에서 구걸하고 속이고 훔치고 싸움질하는 '꽃제비'로 전전했습니다. 저는 또래 7명과 함께 패를 지었는데, 두 명이 두들겨 맞아 죽었습니다. 이런 꽃제비 생활이 4년쯤 됐을 즈음 외할아버지를 만났습니다. 어느 날 브로커가 찾아와 '아버지가 중국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2002년 겨울 그는 브로커와 함께 두만강을 건넜다. 중국의 한 마을에 도착하자 그를 목욕시키고 사진을 찍었다. 그런 뒤 다른 브로커에게 그를 인계하며 "먼 길을 가야 한다"고 했다.

"낌새가 이상해 '아버지는 어디 계시느냐'고 묻자 '한국에 있다'고 했습니다. '한국이 어디냐'고 하니 '대한민국'이라고 했습니다. 당시에는 '남조선'으로만 알고 있어 '한국'이라니까 어디인지 몰랐습니다. 브로커가 '연길(延吉)처럼 조선족이 모여 사는 곳'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가 '남조선'이라고 말했으면 안 왔을 겁니다. 남조선에 가면 잘 먹이고 잘 입힌 뒤 정보를 캐내고는 피를 뽑아내고 살은 개를 준다고 했으니까요."

그는 중국 옌지(延吉)에서 기차를 타고 다롄(大連)으로 갔다. 거기서 또다시 브로커가 바뀌었다.

"다롄 공항까지 데려다준 브로커는 항공권과 위조 한국 여권을 건네며 '검색대를 통과해 몇 번 출구로 가 비행기를 타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다롄 공항은 전산화가 안 돼 있어 위조 여권이 먹혔던 것 같습니다."

조선일보

청와대 국빈 만찬장에서.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인천공항에서 아버지를 만났나요?

"입국 심사에서 위조 여권이 들통났습니다. 그때까지도 제가 중국의 어느 한 도시에 와 있는 줄 알았습니다. 남조선이라는 걸 알고는 꿇어앉아 '되돌려 보내 달라'고 빌었습니다. 국정원에 인계된 뒤에야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아버지는 경기도 평택에서 작은 레미콘업체를 동업하고 있었다. 그는 중학교에 입학했고 동급생보다 세 살 많았다. 하지만 인민학교 4학년을 마치고 꽃제비 생활을 했기 때문에 수업을 따라갈 수 없었다.

"그 무렵 저는 늘 화가 나 있었습니다. 제 자신과 모든 상황이 못마땅했어요. 그러다가 상급 학생들과 싸움이 붙었습니다. 교장선생님이 '북한에서 와서 말썽만 일으킨다. 꼴통 같은 놈'이라고 야단쳤습니다. 그 말을 듣고는 자퇴해버렸습니다."

그 뒤 방황하다가 그는 검정고시를 봤고, 지인의 소개로 부산에 있는 지구촌고교에 입학했다. 귀국한 재외동포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특성화 기숙학교였다.

"그 학교에서 안정을 찾고 체계적으로 공부하게 됐습니다. 원어민 영어 선생님을 만난 것도 운이 좋았습니다. 그분이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슈렉' '알라딘' '니모를 찾아서' 등 만화영화를 주셨습니다. 영화 대사를 듣고 읽고 말하고 썼습니다. 한 달에 영화 한 편씩 마스터했습니다. 3학년이 되면서 '통일을 준비해야겠다'는 꿈을 가졌습니다. 통일이 집(북한)으로 가는 길임을 알았거든요."

그는 서강대 정외과에 진학했고, 한 학기는 교환학생으로 미국 애리조나주립대를 다녔다. 외국 친구들과 함께 석 달간 미국을 여행하기도 했다.

"미국이 왜 강대한 나라가 됐는지를 생각해봤습니다. 이민정책으로 미국은 세계 각국에서 좋은 사람과 기술, 문화를 다 받아들였습니다. 두 번째 미국의 힘은 자유였습니다. 미국인은 자유에 따른 책임,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질 줄 압니다. 자유만 주장하고 자기 책임은 안 지려는 한국과도 비교가 됐습니다."

그는 3년 반 만에 대학을 조기 졸업했다. 그 무렵 방한한 캐나다 하원 의원을 만나 인턴 보좌관 제의를 받았다. 캐나다에서 여섯 달 체류하면서 그는 캐나다 의회가 북한인권결의안을 통과시키는 작업을 도왔다. 그 뒤 영국 외무부가 주는 장학금으로 영국 워릭대에서 석사과정을 밟았다.

"학위논문은 '미국의 강압 프로그램이 왜 북한의 핵을 막지 못했느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지속적인 대북 정책이 없었습니다. 정권이 바뀌면 정책이 바뀌었으니까요. 이 때문에 북한이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현실적으로 강압 외교가 성공하기 쉽지 않다고 봅니다. 봉쇄(封鎖)를 통해 북한의 태도를 바꾸는 것인데, 중국과 러시아의 구멍이 있습니다. 저는 한반도 갈등 해결에 관해 더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이번에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아 미국으로 박사과정 유학을 떠날 수 있게 됐습니다."

―성주씨를 보면 도전적이라고 할까 아니면 수완이 뛰어나다고 해야 할까… 가족의 보호를 받아야 할 어린 나이에 '꽃제비' 생활을 한 게 삶의 태도에 많은 영향을 끼쳤겠지요?

"그 시절은 어떤 상황에도 적응해 살아남는 능력을 단련시켰습니다."

―삶의 가치 기준이 그런 쪽으로만 형성돼 온 것은 아니겠지요?

"남한에 와서 북한에서 제가 살던 방식으로 살려고 했습니다. 불리한 상황이면 거짓말을 했습니다. 제 잘못인데 다른 탓으로 돌려 상황을 모면했습니다. 그런 거짓말이 제 뒤에 축적되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신용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는 데 6년 넘게 걸렸습니다. 그 뒤로 상황을 모면하기보다 솔직하게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행방은 찾았나요?

"2009년 브로커에게서 '어머니를 찾았다'는 연락을 받고 아버지와 함께 중국에 갔습니다. 어머니가 아니었습니다. 되돌아 나오는데, 아버지가 '저 여자도 나 같은 남편이 있고 너 같은 아들이 있을 거다. 구하자'고 말했습니다. 2년 뒤에는 인신매매된 그분의 딸도 데려올 수 있었습니다. 사람을 구하는 게 의미가 있구나를 처음 느꼈습니다. 그 뒤 북한인권시민연합에 참여해 탈북민 구출을 위한 모금 활동을 해왔습니다."

―탈북민 수가 늘어나면서 이제 탈북민 구출은 우리 사회의 관심에서 멀어졌습니다.

"세금을 내서 탈북자를 먹여 살려야 하는 데 불만이 있겠지만, 이는 장기적으로 통일을 준비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훗날 통일이 됐을 때 남북 간에는 '정통성'을 두고 격론이 벌어질 겁니다. 살기 위해 탈출한 북한 주민을 한국이 구출해 정착금을 주는 것은 국가의 책임을 다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글을 쓰는 동안 탈북 여성 12명이 쪽배를 타고 메콩강을 건너다가 두 명이 강물에 빠져 숨졌다는 뉴스가 보도됐다.





[최보식 선임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