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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6 (수)

수리·과학 수업은 괜찮고, 왜 영어만 안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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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어린이집 영어수업 금지… "의견수렴도 없었다" 비판]

교육부, 공청회 등 의견수렴 않고 덜렁 EBS에 토론 프로만 요청

법령 아닌 지침으로 시행땐 교육권·학생학습권 침해 가능성

"영어만 금지 기준도 아리송"

전국 5만여 곳의 유치원·어린이집 방과 후 영어 특별활동 수업을 금지하겠다는 교육부 방침에 대해 학부모 의견을 제대로 수렴한 것이냐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전문가들은 ▲법률이 아닌 장관 '지침'으로 정책을 전격 시행하는 점 ▲주입식 학습을 금지한다면서 영어만 규제하고 수리와 과학·한글 등 다른 과목은 문제 삼지 않는 점 등도 문제로 꼽고 있다.

"교육·학습권 침해 가능성 커"

일부 학부모들은 전국 215만명의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어린이집 정책을 교육부가 갑작스럽게 변경하면서 "의견 수렴 절차도 거치지 않았다"고 반발하고 있다. 이에 대해 교육부는 "오는 12일 방영되는 교육 토론 프로그램에서 이 주제를 다뤄 달라고 EBS에 요청했다"고 8일 밝혔다. 그러나 공청회나 학부모 설문조사 같은 통상적인 방식의 의견 수렴을 하지 않고 "패널 몇 명이 TV에 나와서 찬반 의견을 얘기하는 방송 토론회가 무슨 의견 수렴이냐"는 비판이 나온다. 교육부가 갑작스럽게 방과 후 영어 금지 정책을 발표한 데 이어 국민 의견 수렴까지 졸속 시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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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과 후 영어 수업 금지 같은 중요한 정책을 법령이 아니라 교육부 '지침'으로 바꾸려는 것은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현행 유아교육법 13조는 교육부 장관이 '유치원의 교육과정과 방과 후 과정의 기준과 내용에 관한 기본 사항을 정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법에 따라 교육부는 ▲방과 후 수업은 휴식과 돌봄 위주로 진행 ▲특성화 프로그램은 1인당 하루 한 시간 이내로 하라는 내용의 가이드라인을 시도교육청에 주고 있다. 영어 방과 후 수업을 금지하는 내용도 이 지침에 포함시켜 시행한다는 게 교육부 계획이다.

이에 대해 노기호 대한교육법학회장(군산대 교수)은 "유치원 아이들의 교육 내용은 헌법의 학습권과 자녀 교육권에 관한 것인데, 영어라는 특정 과목을 금지하는 것을 지침으로 정하는 것은 과도한 데다 헌법 위반 소지가 있다"고 밝혔다. 지침은 행정 조직이 내부 운영을 위한 사안을 자율적으로 각 부가 정하는 것인데, 많은 학생의 학습권과 부모의 교육권을 규제하는 내용을 법령이 아닌 지침으로 정하는 것은 국민 기본권 침해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서울교대 허종렬 교수도 "헌법에 국민의 권리를 제한할 때는 필요한 경우에 한해 법률로 한다고 규정돼 있는데, 지침을 통해 하는 것은 아이들 학습권, 학부모 교육권을 침해할 소지가 크다"고 말했다. 장관 지침으로 이 같은 사안을 정하면 정권이나 장관 성향에 따라 관련 정책이 오락가락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왜 영어만 규제하나"

교육부는 영어 방과 후 수업을 금지하는 이유로 ▲영어 수업이 학습·주입식으로 이뤄지고 있고 ▲유아들에게 학습 대신 놀이를 많이 시키려는 취지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영어뿐 아니라 다른 과목들도 영어와 비슷한 조건인데, 교육부는 이런 과목들의 수업 내용에 대해선 검토조차 하지 않고 유독 영어만 문제 삼은 것으로 나타났다.

2015 전국 보육 실태 조사에 따르면 유치원과 어린이집 유아들이 참여하는 특별활동 중 학습과 관련된 것은 영어 이외에도 한글·과학·수리·교구·한자 등이 있다. 예컨대 한글의 경우 '초등 저학년 수준의 주입식 한글 교육을 하지 말라'는 교육부 지침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상당수 유치원·어린이집에서는 방과 후에 한글 학습지를 가르치거나 편지나 알림장을 쓰게 하는 경우까지 있다.

영어만 방과 후 수업을 금지하려는 이유에 대해 권지영 교육부 유아교육정책과장은 "교육 현장에서 영어가 가장 문제라는 말이 많아 그런 것"이라면서 "다른 과목은 아직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한 어린이집 원장은 "정부 기준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이러니 원장들 사이에서 '교육부가 영어 학원들을 살려주기 위해 나섰느냐'는 말까지 도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연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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