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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7 (월)

올해의 사극 ‘역적’, 홍첨지와 촛불혁명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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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투데이 권경률 칼럼니스트] [권경률의 사극 속 역사인물 72 – 역적 : 또 다른 상전이냐 자각한 백성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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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대문호 루쉰은 단편소설 ‘고향’에서 희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희망이란 원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디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다니는 사람이 많아지면 길이 생기듯이, 원하는 사람이 늘어나면 희망이 만들어진다. 드라마 ‘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은 여럿이 함께 만들어가는 희망의 속성을 시의 적절하게 그려냄으로써 2017년 가장 빛나는 사극이 되었다. 연말을 빙자해 TV드라마 부문 ‘올해의 사극’을 뽑는다면 ‘역적’이 유력하지 않을까.

사실 이 드라마는 제목부터 의미심장하다. 역적이 백성을 훔치는 도적이란다. 그럼 무슨 수로 백성을 훔치는가. 옛날 우리나라에서는 백성이 먹을 것을 하늘로 여긴다고 했다. 하지만 역적 주제에 백성을 배불리 먹일 수는 없다. 먹을 게 아니라면? 사람이 밥만 먹고 살지는 않는다. 백성은 희망 또한 먹고 산다.

조선시대 백성들은 대체로 빈곤과 억압 속에서 살았다. 세금이다 뭐다 지배층이 너무 많이 뜯어가고, 신분질서를 잡는다며 위에서 온갖 폼을 잡으니, 아랫사람들은 비참하게 사는 수밖에 없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하루하루 살아내야 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것이라는 희망은 폭발적인 힘을 갖는다.

역적은 바로 그 희망의 불씨를 놓는 자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은 처음부터 역적의 나라였다. 태조 이성계는 애초 고려왕조의 역적이었다. 이성계 세력은 권문세족을 몰아내고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백성에게 희망을 심어줬다. 그 희망이 들불처럼 번져서 조선 건국의 원동력이 되었고, 희대의 역적을 새 지배자로 바꿔놓은 것이다. 이른바 ‘역성혁명’이다. 하지만 이 혁명에는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구시대의 혁명은 인민을 지배하는 상전, 곧 특수세력의 명칭을 변경함에 불과했다.”

일제 강점기의 역사가이자 사상가인 신채호는 ‘조선혁명선언’에서 구시대의 혁명, 즉 성공한 반역이 상전의 교체에 그쳤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고려의 권문세족이 조선에서 양반사대부로 바뀌었을 뿐, 백성에게는 달라진 게 없었다는 말이다. 백성의 희망을 담보로 상전 좋은 일만 한 셈이다. 그것은 거짓 희망이다.

반면 신채호에게 새 시대의 혁명은 민중이 민중 자신을 위하여 일체의 불합리한 장애를 타파하는 것이었다. 사극 ‘역적’은 조선 연산군 때를 시대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백성을 바라보는 관점은 신채호의 근대적인 생각을 닮았다. 백성 가운데서 희망의 불씨를 퍼뜨리는 역적, 홍길동이 나타나지 않았는가. 이건 진짜 희망이다.

드라마에서 역적은 곧 자각한 민중이다. 연산군이 물었다. “너는 고려왕조의 후예냐, 아니면 정승판서의 서자냐?” 홍길동은 답했다. “나는 내 아버지의 아들, 씨종 아모개의 아들이다.” 그는 허균이 빚어낸 소설 속 홍길동을 뛰어넘었다. 타이틀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오직 자각이 있을 따름이다. 극중 폭군과 싸워 이긴 것은 그 자각의 힘이었다.

역적은 또 혁명가이기도 하다. 연산군이 물었다. “그런 천한 몸에서 너 같은 아들이 나올 리가 없다.” 홍길동은 답했다. “임금의 아들인 너는 천한 몸이 되지 않았느냐.” 종의 아들이라고 해서 천하리란 법 없고, 임금의 아들이라고 해서 천하지 않으리란 법 없다. 타고난 신분의 전복! 세상은 바꿀 수 있는 것이다. 희망이 없는 임금도 바꾸면 된다.

“자기의 몸을 푸줏간에 감춘 채 남몰래 다른 마음을 품고서 세상을 부릅뜨고 지켜보다가, 시대의 변고가 나면 다행히 여겨 제 소원을 풀어보려는 자가 호민(豪民)이다. 무릇 이들 호민이야 말로 참으로 두려운 존재다.”

허균은 ‘호민론’에서 세상을 바꾸려는 무서운 사람들을 ‘호민’이라고 일컬었다. 드라마 ‘역적’에서는 ‘홍첨지’들이 등장한다. 이 패거리는 세상을 바꿔나가면서도 늘 유쾌하고 흥이 많다. 오죽하면 홍길동의 아버지 아모개가 ‘떠들썩할 홍(哄)’이라는 성을 붙였을까? 어찌 보면 2017년 대한민국 촛불혁명을 인격화한 것 같다.

‘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은 방영기간(2017년 1~5월) 내내 촛불혁명과 맞물렸다. 촛불집회처럼 역사의 봄을 맞이하는 흥겨운 축제인 동시에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치열한 전장이 극중에서도 펼쳐졌다. 폭군 연산을 왕위에서 끌어내리고, 그의 죄를 일러주는 대목에 이르면 드라마와 현실의 싱크로율은 정점으로 치닫는다.

“이융(연산군의 본명)! 이제 너의 죄명이 무엇인지 알려주마. 너의 죄명은 진짜 위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한 죄, 하여 위를 능멸한 죄, 능상(凌上)이다.”

연산군은 재위기간 중에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켰다. 두 사화의 발단은 각각 김종직의 ‘조의제문’과 폐비 윤씨의 죽음이지만 본질은 하나로 모아진다. ‘능상’, 위를 능멸하는 풍속을 바로잡겠다는 것. 연산군이 실록에 육성으로 밝힌 사화의 본질이다. 폭군 연산에게 위를 능멸한다는 것은 신하가 임금을 업신여긴다는 뜻이었다.

드라마에서는 홍길동이 연산군에게 ‘능상죄’를 물었다. 백성은 임금의 하늘인데도 깔보고 피눈물 흘리게 한 폭군을 꾸짖었다. 극중 쫓겨난 임금과 변화의 도래는 시대정신이 잘 담겨있다. 그러나 희망은 곁에 머물다가도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것. 촛불혁명의 정신을 이어가려면 홍첨지들이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2017년에도 다양한 사극이 현재와 과거의 대화를 줄기차게 해나갔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을 가지는 만큼 역사를 묻고 상상하고 현실에 빗대는 즐거움은 커진다. 올해 ‘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이 그랬다면 내년에는 또 어떤 드라마가 희망을 그려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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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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