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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5 (금)

시험공부 대신 연구에 매진… '덕후들의 학교'서 자발적 탐구력 키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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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수학학교 재학생 박채원양

연구 중심의 대안학교 '폴수학' … 매 학기 논문 작성하며 실력 다져 … 최근 독학사 취득… 최연소 기록학업 비결? 능동적 태도·열린 사고

박채원(폴수학학교 11학년)양은 최근 만 16세로 컴퓨터과학 전공 독학사를 취득했다. 독학사는 일정 학력 조건을 충족하면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도 학사 학위를 받는 제도다. 고교 2학년 또래인 박양은 이제 대학원에 진학할 수 있다. 올해 전체 독학사 취득자 887명 중 최연소 기록이다. 지난 8일엔 일본에서 열린 2017 ICCT(국제융합기술콘퍼런스)에 참가해 세계 학자들 앞에서 '인공지능 비서 앱의 사용성 평가' 논문을 발표했다. 아이돌 가수를 따라다니느라 공부는 뒷전이던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다. 2014년 봄, 서울 강남의 한 중학교에서 충북 괴산의 대안학교인 폴수학학교로 전학한 뒤 박양의 삶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빠르게 변하고 있다.

◇관심 분야와 수학 접목해 연구

2013년 중학교 1학년이던 박양의 교과 성적은 과목 간 편차가 컸다. 국어·사회는 90점 안팎으로 곧잘 했으나, 수학은 50점을 받을 정도로 성적이 낮았다. 막연히 음악을 전공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지만, 열의를 다해 연습하지는 않았다. 특별히 한 것 없이 어중간한 1년을 보냈다. 어느 날 아버지 박왕근씨가 전학 제의를 했다. 카이스트 박사 출신인 박씨는 수학을 중심으로 융합 교육을 하는 대안학교인 폴수학학교 개교를 앞두고 있었다. 현재 교장인 그는 "평균 점수는 낮지만, 좋아하는 분야엔 집중력 높은 딸에게 연구 중심 대안학교가 잘 맞을 것 같았다"고 했다. 박양은 '시험이 없다' '원하는 분야만 마음껏 파면 된다'는 얘기에 두말 않고 따라나섰다.

폴수학학교는 매 학기 학생이 원하는 주제를 수학 원리와 접목해 논문을 쓰도록 한다. 모든 시스템이 이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박양은 "짧은 시간에 국내외 학회에서 발표 가능한 논문을 쓰고 검정고시와 독학사까지 취득한 건 학교 커리큘럼 덕분"이라고 했다. 기숙학교인 이곳에서 학생들은 오전에 일일 계획서와 감사 편지를 쓴 뒤 자기만의 연구를 하거나 프로젝트 수업을 한다. 오후에도 원하는 공부나 비교과 활동을 한다. 이후 자기주도 학습을 하는데, 보통 논문 연구나 교과 공부를 한다. 박양은 "모든 것을 내가 선택하고 책임져야 하는 구조"라며 "나이에 비해 큰 성과를 낼 수도 있고 반대로 하는 일 없이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고 했다.

처음 학교에 들어갔을 때 박양은 논문이 무엇인지조차 몰라 애를 먹었다. 당시 전공하려던 음악을 큰 주제로 잡고, 관련 분야 연구자의 논문과 참고 문헌을 살피면서 감(感)을 잡았다. 이 과정에서 화성학·작곡 이론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다 보니 의외로 별 흥미가 당기지 않는다는 점을 알았다. 1년여 연구하다가 음악을 전공하겠다는 목표를 깨끗이 접었다. 진로 고민이 이어졌다. 여러 교사와 상담하다 보니, 음악 다음으로 관심 있던 컴퓨터와 교육을 엮어 보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전공 책을 찾거나 심포지엄에 참가하면서 주제를 서서히 좁혀, 한국 학교의 컴퓨터 교육과정 현황을 분석하고 더 나은 교육과정을 제시하기로 했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으니 매일 질문이 넘쳐났다. 궁금증을 체크해놓고 수시로 교사를 찾거나 이메일을 보냈다. 이 학교 교사들은 모두 국내외 석·박사 출신이다. 박양은 "선생님들께서 귀찮은 내색 없이 답변해주신 덕분에 조금씩 나아갈 수 있었다"고 했다. 반년 만에 초등 컴퓨터 교육과정 모형을 다룬 논문이 한 편 완성됐다. "이 논문을 기한에 맞춰 한국컴퓨터교육학회에 제출했더니 감사하게도 발표 기회를 주셨어요. 끊임없이 '내 길이 맞나' 고민했는데, 이날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후 컴퓨터공학과 산업공학 분야인 사용자 경험(UX)·인간-컴퓨터 상호작용(HCI) 등으로 연구 방향을 뻗어나갔다.

현재 초등학생부터 고교생까지 재학 중인 이 학교에는 박양 외에도 별난 학생이 많다. 어릴 적부터 증권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지속해 국제산업경영공학학회 심포지엄에서 베스트 트랙 어워드를 수상하고 현재 인공 신경망을 이용한 포트폴리오 자산 배분 비율 최적화를 연구하는 학생, 정보 보안 전문가를 꿈꾸며 시대별 암호부터 차세대 암호를 연구 중인 학생 등이다. 그야말로 '덕후(한 분야에 열중하는 사람을 뜻하는 신조어)들의 세상'인 셈이다.

조선일보

박채원양이 그간 학교에선 쓴 논문을 들고 있다. 박양은 “처음 쓴 논문과 최근 쓴 논문을 비교하면 장족의 발전을 이뤘다”며 웃었다. /임영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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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 분야와 접목하니 수학이 재밌어요"

폴수학학교에는 몇 가지 졸업 요건이 있다. ▲대입 논술고사 수준의 수리 논술 30문제를 두 가지 방법으로 풀이해 제출할 것 ▲국내 학회에서 논문 2편을 발표하거나 저널에 1편 이상 게재할 것 ▲자연계열 고교 수학 및 과탐 수준을 갖출 것 등이다. 조기 졸업해 국내외 대학에 진학한 학생도 있고, 자기만의 속도로 천천히 졸업하는 학생도 있다. 박양의 경우 국내 학회에 논문 5편을 발표했고, 2편이 저널에 게재될 예정이므로 논문 요건을 충족했다. 올 초 고졸 검정고시에도 합격했다.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대학에서 전공 기초 공부를 다시 시작하는 것보다 대학원에 진학해 연구를 이어가는 게 나을 것이라 보고 독학사를 따기로 했다. 지난 4월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해 6개월 만에 합격증을 받았다. 대학 교재인 전공 서적을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교사에게 일일이 물어가며 극복했다. 내후년엔 산업공학 분야 국내 대학원에 진학할 계획이다.

일반 중학교에서 쩔쩔매던 수학은 박양이 즐기는 과목이 됐다. 박양은 "좋아하는 학문과 접목하니 그렇게 싫던 수학에 흥미가 생기더라"며 "수학 100문제를 두 가지 방법으로 푸는 방학 과제 등을 하면서 수학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했다.

이곳에선 어떤 학생들이 학업을 잘해낼까. 박양은 "자기 미래를 직접 설계하려는 학생"이라고 했다. 특정 분야를 끈질기게 탐구해야 하므로 남이 시킨 대로 하다간 오히려 흥미를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린 학생 중엔 적성을 찾지 못한 경우가 더 많다. 박양은 "중요한 건 능동적인 태도와 열린 사고"라고 했다. "당장 내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도 됩니다. 저도 그랬거든요. 하지만 적극적으로 뭔가 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연구 주제를 찾는 데 긴 시간이 걸리지 않을 거예요."

[김세영 조선에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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