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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8 (월)

[유석재의 돌발史전] 1950년 낙동강 전투가 유고슬라비아를 살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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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가 장기화되면서 소련은 유고 침공 타이밍을 놓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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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유고슬라비아 관영 신문 '폴리티카'의 1951년 1월 21일자 풍자 만화. 한반도 지도를 거꾸로 뒤집은 소련이 "한국전쟁은 '북침'으로 일어났다"고 억지 주장을 하고 있다.


10년 전 공연 담당 기자 시절, 국립발레단의 세르비아 공연을 취재하러 베오그라드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도 여전히 1999년 나토군에 의해 폭격 당한 상흔이 베오그라드 시내에 남아 있었으니, 부서져 내려앉은 건물이 그대로 방치된 것을 여러 번 봤습니다. 게다가 당시 세르비아는 큰 수해까지 입은 상태였습니다. 그곳은 한때 ‘제3세계’의 중심과도 같았던 유고슬라비아의 수도였습니다.

그때 한 세르비아인에게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오래 전 티토 시절 유고슬라비아의 전성기가 한국의 6·25 전쟁에서 비롯된 것을 아느냐”고 말입니다. 그런 일이 있었느냐며 놀라워하더군요.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낙동강 전투가 유고슬라비아를 살렸다”는 얘기가 될 것입니다.

2008년에 출간된 ‘한국전쟁과 동유럽’(아카넷)은 김철민 한국외대 세르비아·크로아티아어과 교수가 쓴 연구서입니다. 베오그라드 국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김 교수는 오래 전 유고 측 자료를 뒤지다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만리타국에, 뜻밖에도 6·25 전쟁과 관련된 문서가 엄청나게 많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자료들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고, 매우 객관적인 시각에서 6·25 전쟁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1948년 유고슬라비아의 티토는 독자적인 노선을 걷고자 했던 반면, 소련의 스탈린은 다른 동유럽 공산국가와 마찬가지로 유고를 통제하고 위성국 취급하려 했습니다. 이것은 이른바 ‘코민포름 갈등’으로 표면화됐습니다. 코민포름은 1947~1956년 존속했던 국제공산당 정보기관으로, 당초 소련 측이 본부를 베오그라드에 뒀으나 유고와 소련의 갈등으로 유고가 1948년 제명되자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로 본부를 옮겼습니다.

유고가 군사적인 위기에 직면한 것은 이 무렵부터였습니다. 주변 사회주의 국가들로부터 고립되자 티토는 친(親)서구 노선을 걸어야 하는 처지가 됐습니다. 소련이 언제 침공할 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비밀이 해제된 유고 측 문서를 조사해 본 결과, 당시 소련은 유고 주변 국가들에 무기와 군수물자를 제공하면서 대대적인 유고 침공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 시기는 바로.

1950년 여름이었습니다.

유고도 이를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해 6월 25일, 전혀 엉뚱한 곳에서 포성이 울렸습니다. “발칸 대신 한국에서 전쟁이 났다!” 유고슬라비아의 관영 신문 보르바(Borba)는 이렇게 보도했습니다. “오늘 아침 새벽 북한 인민민주주의공화국의 군대가,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위해 미·소 간에 수립된 38선 전 경계선에 걸쳐 남한을 침공해 들어갔다.”

사실 이 내용은 시기와 지역으로 볼 때 놀라운 감이 있습니다. 소련에서 “북한이 남한군의 선제 공격을 격퇴하고 반격을 시도했다”는 왜곡 선전을 벌이고 있었던 그 시각이었기 때문입니다. 유고 언론만은 ‘북한군의 남침으로 전쟁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꿰뚫어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들은 전쟁 뒤에도 줄곧 ‘북침설’을 정설로 받아들였고, 이는 일부 서구 지식인들에게까지 퍼져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조차 한때 북침설을 신봉했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유독 유고슬라비아만은 계속 ‘남침이 맞다’고 봤습니다.

6·25 발발 이후 유고 측은 이 전쟁에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멀리서 일어난 남의 나라 전쟁이 아니라, 바로 자신들의 운명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전쟁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미국은 6·25 전쟁을 계기로 유고의 전략적 중요성을 더 깊이 인식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국면이 등장합니다.

한반도 전체가 금방 북한군에 넘어갈 것 같았지만, 뜻밖에도 한국군의 거센 저항으로 낙동강 전투가 길어지면서 소련은 유고 침공의 타이밍을 놓쳤고, 끝내 침공 계획이 무산됐다는 것입니다.

조선일보

1952년 자그레브에서 열린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간부회의에 참석한 티토(가운데). 뒤편에 마르크스·엥겔스·레닌 사진이 걸려 있지만, 스탈린 사진은 없다.


유고가 ‘6·25는 북한의 남침이었다’는 사실을 정확히 인식했던 것은, 최대한 객관적인 시각으로 이 전쟁을 관측해야 자신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위기를 넘기긴 했으나 중공군이 6·25에 참전할 무렵 유고 측이 작성한 비밀 문서에는 이런 내용도 있습니다. “소련이 중국을 한반도에 밀어 넣고선 동유럽 군대를 동원해 우리와 서구를 공격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자칫 3차 세계대전으로 확산될 수도 있다.” 당시 유엔 안보리 의장국이었던 유고는 전쟁 기간 내내 중립적인 위치를 고수했습니다.

결국 유고슬라비아는 낙동강 전투의 장기화 덕에 목전에 닥친 전쟁을 피해 국가적 위기를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6·25 전쟁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냉전 세력들 간의 첨예한 이해관계속에서 어느 한 블록에 편입되기 여려운 국가들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습니다. 유고가 훗날 비동맹 외교정책을 수립하고 제3세계의 리더 국가로 나아갈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바탕이 바로 6·25 전쟁이었습니다. 김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국전쟁의 진정한 승자는 미국도 소련도 아닌 유고슬라비아였다.”

2008년 처음 이 기사를 썼을 때 신문을 본 독자 한 분이 이렇게 정색하는 의견을 내신 적이 있습니다. ‘한국전쟁의 진정한 승자가 유고라고? 진정한 승자는 참전 용사들이 아닌가!’ 네… 그것도 맞는 말입니다. ^^;;

2014년 베오그라드에서 제가 이 얘기를 들려줬던 사람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인 사라예보 출신 세르비아인으로, 한국에 몇 년 체류하기도 했던 20대 여성이었습니다. 그는 “그런 일이 있었는 줄 몰랐다”고 놀라워했습니다. 그가 한국에서 ‘사라예보 출신’이라고 하면 나이 지긋한 한국인은 ‘아! 사라예보~’라며 친근감을 보였다고 합니다. 저는 그 이유에 대해 “1973년 사라예보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 대회에서 이에리사 선수가 우승을 했기 때문에, 사라예보가 어느 나라 도시인지는 몰라도 이름 자체는 한국인에게 무척 친숙하다”고 설명했습니다. 우크라이나의 경우도 그렇지만, 현대에는 우리가 멀다고 생각하는 나라들도 알고 보면 생각보다 가까운 관계에 놓여진 셈입니다.

조선일보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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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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