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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5 (토)

[외환위기 20년, 끝나지 않은 고통](상)세금으로 연명하던 기업 퇴출…30대 그룹 63% ‘물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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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대마불사, 한국 기업사 바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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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무공무원이던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은 정년을 앞두고 역술가에게 점을 본 뒤 “흙과 관련된 사업을 하라”는 말을 듣게 된다. 1974년 2만원에 일제강점기 때 폐광된 강원도의 몰리브덴 광산을 사들여 한보상사를 세웠다. 이후 4424가구로 당시 최대 규모였던 은마아파트 건축을 계기로 재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한보그룹의 본사는 은마아파트 상가에 위치했다. 이후 철강 등으로 사업의 세를 넓히며 그룹 창립 20여년 만에 재계 14위에 한보그룹을 올려놨다. 정권을 향한 ‘통 큰 로비’가 사업의 밑천이었다.

한보철강이 제철소를 지을 돈이 부족해 여기저기 손을 벌리며 ‘은행 돈 먹는 불가사리’로 소문이 나면서 은행 대출이 막히고, 사채로도 연명이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다. 1997년 1월23일, 한보그룹의 주거래은행이었던 제일은행은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재가 아래 한보그룹의 부도를 선언했다.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구제요청’으로 상징되는 한국의 외환위기는 1970년대 이후 고속성장을 이어가며 ‘한강의 기적’을 일궜던 한국 경제 전체에 급제동을 거는 사건이었다. 전 국민의 삶과 의식에도 큰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었지만, 정부와 금융권의 비호 아래 덩치 키우기에만 집중했던 한국 대기업들이 줄지어 부도 신세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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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보·기아·대우…무너진 ‘대마불사’

1997년 외환위기는 수익성과 내실보다 무리한 외형 키우기, 매출에 집중하던 당시 한국 기업들을 한 방에 무너뜨린 사건이었다. 지금이야 연간 3% 성장률도 목표치를 달성하기가 쉽지 않지만, 외환위기 직전인 1996년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7.6%였다. 연 6~8%대의 고속성장 시대가 이어질 것처럼 보였다. 일단 빚을 내 투자하면 어떻게든 수출로 이어지면서 마냥 연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기업만 키우면 정경유착으로 덩치를 더 키울 수 있었다. 한보그룹만 하더라도 수서·대치 택지개발 예정지구 특별분양을 위해 정태수 회장이 청와대 관계자 등 정·관계 유력 인사들에게 거액의 뇌물을 상납했다. 이후에도 주택 사업에서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각종 계열사를 만들고, 기업 인수를 강행하며 문어발식 확장을 이어갔다. 철강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제철소를 지을 돈을 무리하게 회사채 발행, 차입, 어음, 매각 등으로 확보하려고 한 것이 화를 키웠다. 최종적으로 1997년 1월23일 50억원의 어음을 결제하지 못해 부도에 이르렀으며, 당시 한보철강이 졌던 빚만 5조원에 육박했다.

당시 재계 14위 그룹이었던 한보가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당시 종금사들이 앞다퉈 여신을 회수하자 다른 대기업들도 연쇄부도 위기에 몰리게 됐다.

한보를 시작으로 삼미, 대농, 진로, 한신공영 등 당시 30대 그룹에 속한 기업들이 차례로 무너지더니 급기야 재계 서열 8위 기아그룹이 부도유예 대상 기업이 됐다. 대외적으로 아시아 외환위기의 전운이 감돌면서 태국발 외환위기도 겹쳤다. 돈줄이 마른 금융사들이 기아차 대출금을 일제히 회수하면서 기아차도 더 이상 버티기 힘들어진 것이다.

한국 기업의 세계화를 상징했던 대우도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그룹 전체가 해체됐다. 대우는 1967년 대우실업을 모태로 금융, 전자, 중공업, 자동차 등으로 사업을 넓히며 20여년 만에 4대 그룹 안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급성장했다. 특히 1993년부터는 ‘세계경영 우리기술’의 슬로건을 선포하고 옛 공산권 국가와 개발도상국에 공격적으로 해외법인을 세우며 사세를 크게 키웠다. 1993년 당시 150여개 수준이었던 대우의 해외법인은 1998년 11월 396개까지 늘었다.

그러나 삼성을 제치고 재계 서열 2위에 오른 지 1년 만인 1999년 8월, 대우는 채권단 관리하에 워크아웃을 맞이함으로써 그룹 해체의 길을 걷게 된다. 당시 11개 계열사는 회사가 통째로 팔리거나 사업 부문별로 분할 매각되면서 각자도생의 길로 접어들었다. 대우조선해양 등 일부 계열사는 여전히 새 주인을 기다리며 대우그룹 구조조정 20여년이 되어가도록 지난한 행보를 이어가는 중이다.

■ 무리한 외형·차입 확대

외환위기 당시인 1998년 한국의 30대 그룹 가운데 19곳이 현재 해체되거나 3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30대 그룹의 63%가 물갈이된 것이다. 실속보다는 외형이 기업의 지향점이었다. “부채도 자본”이라며 기업들은 대출에 막힘이 없었다. 그사이 기업의 경쟁력은 자라지 않았다. 당시 대기업들의 부도 사태는 기업의 수익성이 떨어지자 버티지 못하고 쓰러진 것이 핵심이다. 자동차, 건설, 철강 등의 산업들이 대체적으로 공급에만 치중하면서 어느 정도 구조조정이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기업들은 여전히 무리하게 매출 확대, 외형 성장에만 집착했다.

LG경제연구원은 당시 보고서에서 “양적 확대에 주력해왔던 기업들의 성장전략을 세계 경제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확대되고 후발 개도국들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점차 한계에 부딪치고 있다”며 “전반적인 공급 과잉과 생산성 저하로 한계기업의 퇴출과 인수·합병 등 구조조정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이유는 금융시장의 변화에 기업들이 적응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금융시장이 개방되고 자율화되면서 국내 금융기관들이 대기업을 지원하는 형태도 이전과는 달라진 것이다. 과거에는 대기업이 부실화하더라도 정책당국의 지원을 받아 손실을 메꿀 수 있었지만, 더 이상 정부의 지원을 기대하기 어려워지면서 금융기관들이 부실기업들을 조기에 정리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해진 것이다. 이 같은 변화에 대기업들이 재무구조의 안정성을 우선적으로 확보해야 했지만 무리한 차입경영을 이어가면서 결국 부도를 맞게 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1996년 당시 30대 그룹 평균 부채비율이 355%였고, 한보의 경우는 2086%에 달했다.

이근태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경공업 중심에서 중화학 중심으로 산업구조를 전환, 부채로 투자를 일으키고 수출로 이어지는 양적 성장 정책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 IMF 외환위기 당시 기업들의 부도 사태”라고 지목했다.

<이윤주 기자 run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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