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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1 (월)

보이나요, 외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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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화가 팀 아이텔 개인전 "혼자일 때, 진정한 나를 발견"

독일 화가 팀 아이텔(Eitel·46)의 그림은 쓸쓸하다. 늦은 밤 전철 손잡이에 기대 차창을 바라보는 남자, 해 질 녘 텅 빈 놀이터에 남아 그네 타는 아이를 보듯 서글프다. 무채색 바탕에 그려진 인물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숙였거나 등을 돌렸다. 대부분 혼자이고, 둘 이상이어도 서로 눈길을 마주치지 않는다.

11월 12일까지 서울 소격동 학고재갤러리에서 열리는 팀 아이텔의 '멀다, 그러나 가깝다' 전시는 번뜩이는 아이디어, 궤변에 가까운 수사가 난무하는 현대미술계에 순수회화의 힘을 보여준다. 전시 제목은 발터 벤야민의 에세이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따왔다. "세상의 모든 사람과 사물에는 예술작품처럼 아우라가 있다. 다만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뿐"이라고 화가는 말했다.

조선일보

무릎 꿇고 앉은 여성이 혼자서 뭔가를 적고 있는 ‘건축학 학습’(2017). 단조로운 선, 깊고 낮은 채도의 화면이 현대인의 고독을 진하게 드러낸다. /학고재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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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의 군중 속 한 사람이지만 저마다 자기 삶의 주인공인 인물들을 데려와 화가는 캔버스에 하나씩 그려넣었다. 혼자 글을 쓰는 여학생, 바짓주머니에 손을 넣고 언덕을 올라가는 청년, 들판에 홀로 선 노인…. 왜 다들 혼자냐고 묻자 "혼자일 때 우리는 자신에 대해 뭔가를 발견하고,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인물의 이목구비는 뿌옇게 뭉개져 선명하지 않다. "어디서 본 듯한, 혹은 나 자신이 아닐까 상상하며 감정이입 하기를 원해서"다. 얼굴보다는 자세나 동작을 신경 써 그렸다. 관람객이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자유롭게 해석할 여지를 주고 싶었단다. 뒷모습을 즐겨 그리는 이유는 "관람객이 그림 속 인물들과 같은 곳을 바라보면 그 장소에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마주 보는 것보다 등 뒤에서 볼 때 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지요."

조선일보

추상과 구상을 넘나들며 회화의 부활을 선도하고 있는 독일 화가 팀 아이텔. /학고재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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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텔의 그림이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는 배경의 디테일을 제거한 탓이다. '건축학학습' '인테리어와 왕관'처럼 화면 속 인물만 지우면 그대로 추상화가 될 만큼 화가는 몇 개의 선과 면만으로 안과 밖의 공간감을 표현했다. "우리는 자기가 본 것의 디테일이 아니라 그 순간 느끼고 경험한 것을 기억하니까요." 화면의 5분의 4를 차지한 회색 벽면 뒤로 한 남자가 어둠 속에 구부정하게 서 있는 그림 '난간'은 가슴을 서늘하게 파고든다.

팀 아이텔은 독일 통일 직후 회화의 부활을 이끈 신(新)라이프치히 화파의 대표주자다. 문학과 철학을 전공했지만 "지성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완벽한 도구는 회화"란 생각에 라이프치히 시각예술대학에서 다시 그림을 배우며 구(舊)동독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전통을 체득했다. 개념미술, 영상, 뉴미디어 등 포스트모던이 번성하던 시대,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며 회화의 힘을 보여준 신라이프치히 화가들은 유럽은 물론 뉴욕 미술시장에서도 큰 호응을 얻고 있다. 베를린, LA를 거쳐 파리에서 작업하는 팀 아이텔은 2년 전부터 파리의 유명 미술학교 '에콜 데 보자르'의 최연소 회화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02)720-1524

[김윤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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