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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1 (월)

[friday] 太古의 인류가 남긴 손길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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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레제지

독특한 자연 지형에 사냥감 많았던 원시인 화려한 문화 꽃피워

생동감 넘치는 필선

순록·맘모스·말 등 2m 크기 넘는 벽화 젖은 회벽 그었던 손가락 자국도 남아있어

어떤 미술사 책을 열어도 첫 페이지는 다 똑같이 구석기 동굴벽화로 시작한다. 명색이 미술사를 공부한다면서도 동굴벽화를 보러 선뜻 나서기가 쉽지 않았다. 동굴벽화는 프랑스 중부 내륙의 도르도뉴 지역에 집중적으로 모여 있지만, 대중교통으로 접근하기 쉽지 않았고 여행 정보도 알려진 게 별로 없어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조선일보

프랑스 몽티냐크 ‘라스코4’에 재현해놓은 동굴벽화. 거대한 순록과 황소 떼가 뛰어논다. 원시는 과연 이러했을 것만 같다. ⓒDan Courtice-Semitour Périg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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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파리로 간 후 기차를 세 번씩이나 바꿔 타고 마지막엔 장거리 택시까지 타는 2박3일의 긴 여정 끝에 드디어 루피냐크라는 동굴 앞에 서게 됐다. 구석기 동굴벽화는 대부분 보존상 문제로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고, 극히 일부만 제한적으로 공개되고 있었다. 게다가 루피냐크의 경우 입장객이 하루 550명으로 제한돼 있다.

이 지역의 유일한 기차역 레제지에 내려 주변을 돌아볼 땐 여기가 정말 '선사시대의 세계 수도'로 알려진 그곳인지 당황할 정도로 한가로웠다. 한때는 맘모스 떼가 줄지어 다녔던 곳이었을 텐데…. 역을 빠져나오니 오른편으로 꽤 큰 건물이 눈을 가로막았다. '호텔 크로마뇽'. 이름이 예사롭지 않았다. 1868년 레제지 철도 공사 중 이 호텔 바로 뒤에 있는 동굴에서 현생인류의 화석이 최초로 발견되었다. 그게 바로 크로마뇽인 화석이다. 내가 정말 인류의 고향에 와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레제지 마을은 뜻밖에 활기찬 모습이었다. 길에 자동차가 가득했고 차 위엔 카누가 매달려 있었다. 레제지를 가로지르는 베제르강은 오래전에 동물들로 붐볐겠지만, 오늘날엔 수상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마을 중심가로 들어가 보니 오리 그림이 들어간 가게 간판이 눈에 자주 띄었다. 이 지역 정보를 검색해보니 레제지는 푸아그라의 집산지였다. 구석기 문화의 중심지에서 프랑스를 대표하는 요리인 푸아그라까지 원 없이 먹을 수 있게 되다니. 역시나 맛은 일품이었다.

호텔에 도착해 짐을 풀고 곧바로 국립선사박물관에 달려갔다. 이곳은 세계적으로 정평이 난 고고학 박물관으로 짜임새 있는 전시도 좋았지만, 무엇보다도 인상 깊게 다가온 건 박물관에서 바라본 베제르 계곡의 풍경이었다. 거대한 암반으로 이루어진 좁은 계곡이 한없이 펼쳐져 있고 한가운데엔 베제르강이 흐르고 있었다. 동물이 물을 마시러 협곡으로 들어오면 쉽게 빠져나갈 수 없는 형국이었다. 마치 협곡이 거대한 덫이 되어 동물을 가두는 셈이었다. 이 같은 독특한 자연 지형 덕분에 여기에 살았던 원시인들은 사냥감을 한없이 공급받으면서 구석기 시대에 화려한 문화를 꽃피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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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해 개장한 ‘라스코4’ 건물 전경. 2 루피냐크 동굴벽화에 그려진 코뿔소. 3 호텔 크로마뇽 내부. 4 국립선사박물관에 전시된 뼈 무더기 및 각종 화석. ⓒDan Courtice-Semitour Périgord· ⓒgrotte de Rouffignac· 국립선사박물관·호텔 크로마뇽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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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백미는 루피냐크에서 목격한 동굴벽화. 루피냐크는 1만3000년 전 구석기인이 그린 벽화를 간직하는 곳인데, 관람은 코끼리 기차 같은 전동 기차를 타고 단체로 이뤄졌다. 장난감 같은 관람용 기차 모습에 실망했지만 기차가 움직이면서 진귀한 풍경이 속속 눈앞으로 다가왔다.

이 동굴은 2차 세계대전 때는 프랑스 레지스탕스들의 은신처로 쓰였다고 하는데 입구 쪽 동굴엔 이들이 남긴 구호가 보였다. 이윽고 이 동굴에서 겨울을 난 동굴 곰의 발톱 자국이 벽에 나타났다. 원시인들이 남긴 그림은 더 깊이 들어가면서 하나둘씩 정체를 드러냈다. 하얀 석회암 암반은 일종의 캔버스였던 것이다.

맨 마지막 큰 방에 다다르면 관람객들을 잠시 내려서 천장에 그려진 벽화를 자유롭게 감상하게 해줬다. 천장 규모는 상당했다. 여기에 순록 떼와 맘모스, 그리고 말과 황소들이 한가득 그려져 있었다. 그림의 스케일이 상당해 순록이나 산양의 크기는 거의 2m는 더 돼 보였다. 원래 동굴의 천장 높이는 1m도 되지 않았고, 원시인들은 몸을 구부리거나 누워서 그림을 그려넣었을 것이다. 젖은 회벽을 손가락으로 그은 자국도 보였다. 스케일과 함께 필선도 생동감이 넘쳤다. 태고의 인류가 남긴 손길.

마지막 날 아침, 내친김에 라스코 동굴벽화가 자리한 몽티냐크로 향했다. 비록 진짜 라스코 동굴은 볼 수 없더라도 그 앞에라도 한번 서보고 싶었고, 비록 모조이지만 원래 모습을 충실히 구현했다고 알려진 '라스코2'도 궁금했다. 라스코2는 재료까지 포함해 정교하게 재현했다고 알려졌지만 라스코 동굴벽화를 부분적으로만 재현해 진짜 동굴벽화가 주는 감동을 주기에는 미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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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선사박물관 네안데르탈인부터 현생인류의 선사시대 유물이 체계적으로 전시되어 있다. 입구에서 관람객을 맞이하는 복원된 원시인류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왜 이 지역이 ‘선사시대의 세계수도’를 자부하는지를 알려주는 기준이 되는 베제르 계곡의 구석기 유적과 다양한 선사시대 유물을 만나볼 수 있다. 6유로.
http://musee-prehistoire-eyzies.fr

루피냐크 동굴 레제지에서 20㎞ 정도 떨어져 있고 택시로 갈 수 있다. 하루 관람객은 550명으로 제한된다. 9~ 11월1일까지 오전 10시~11시30분, 오후 2시~5시. 7.5유로.라스코 선사시대의 동굴벽화를 대표하는 라스코는 보존상 이유로 1963년부터 폐쇄되었고 유적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이 동굴벽화를 재현한 라스코2가 만들어졌다. 지난해 12월, 보다 대규모로 재현된 라스코4가 개관했다. 입장시간이 매달 달라 홈페이지를 통해 꼭 사전확인 해야 한다. www.lascaux.fr

카누·카약 대여 레제지 안에 카누와 카약을 대여할 수 있는 곳이 있다. 여기서 안전요원과 함께 또는 자유롭게 베제르 강을 탐험할 수 있다. 카누는 1시간30분(9㎞) 코스 16유로, 2시간 30분 코스(13㎞) 18유로, 4시간 코스(19㎞)는 20유로. canoesvalleevezere.com

레제지 호텔 레스토랑 레제지 마을 안에는 깨끗하고 친절한 중저가 호텔이 많다. 호스텔리어 두 파시에(Hostellerie du Passeur)는 국립선사박물관 바로 앞에 있고 베제르 강변과도 가깝다. 레스토랑에서 아침과 저녁을 먹을 수도 있다. www.hostellerie-du-passeur.com/fr

[양정무·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이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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