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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4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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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아닌 범죄 '데이트폭력'] "난 데이트 폭력 피해자였다"…악몽이 돼버린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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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데이트 폭력, 마음을 할퀸다 / 가해자들 ‘사랑해서 그랬다’ 합리화 / 피해자는 자기 비하·죄책감에 고통 / 어렵게 관계 끊어도 두려움 계속 / 대부분 구두경고 등 소극적으로 대처 / 협박·스토킹 등 2차 피해 호소 빈번 / 신고·전문가 상담 등 적극적 맞서야 /“폭력 징후땐 주변서라도 개입 바람직”

세계일보

“사랑해서 그랬다.” ‘데이트폭력’ 가해자들이 흔히 하는 변명이다. 데이트폭력을 ‘사랑 싸움’, ‘치정 사건’ 정도로 인식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신체적인 고통은 물론 사회생활을 하기 힘들 정도의 심리·정신적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세계일보는 사회문제로 대두된 데이트폭력의 실태와 피해자들의 고통 등을 살펴보고 예방대책을 모색하는 시리즈를 3회에 걸쳐 진행한다.

“그저 가슴 시린 ‘첫사랑’이었으면 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너와 교제했던 3년의 시간이 악몽과 같았다는 것을 스스로도 인정하기 힘들었다. 이제 와서 생각하니 그때 어떤 대처도 하지 못하고 당하고만 있던 내가 너무 비참하고 한심하다.”

대학생 A(23·여)씨의 고백은 참담하다. 가장 아름다워야 할 20대의 연애는 남자친구의 과도한 집착과 폭행으로 악몽이 되어 버렸다. 몸도 마음도 망가졌고 남은 것은 자괴감뿐. A씨는 “데이트폭력 피해로 일상생활이 힘겹다”고 말했다.

연인관계에서 일어나는 데이트폭력 사건에서 ‘사랑해서 그랬다’는 가해자의 변명이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피해자는 신체적 상처에 괴로워하는 것은 물론 가해자와의 관계가 끊어진 뒤에도 심리적 고통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A씨의 경험에는 데이트폭력 피해자들이 고통과 좌절, 가해자와의 관계 단절 후에 어김없이 직면하는 정신적 후유증이 그대로 녹아 있다.

세계일보

◆사랑의 가면 쓴 ‘데이트폭력’…마음에 더 큰 상처 남긴다

활달하고 친절한 남자의 모습이 좋았다. 언제 어디서든 분위기 메이커를 자처하고 다정하고 세심해 주변에서는 모두 ‘네 남친 정말 괜찮다’고 칭찬했다. A씨의 어깨가 으쓱해질 만큼 기분 좋은 시작이었다. 하지만 연애가 무르익자 남자는 조금씩 본색을 드러냈다. 수시로 휴대전화를 가져가 통화목록 등을 살폈다. 연인관계에서 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얘랑은 연락하지 마’라며 같은 과 남학생을 비롯해 모든 이성과의 관계를 차단했다. A씨는 속박받는 느낌에 이따금 답답했지만 이 모든 것이 사랑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툼이 잦아질 수밖에 없었다. 감정이 격해진 남자는 A씨를 밀치거나 머리를 잡아당기기도 했다. 심각한 정도는 아니라고 여겼는데, 남자와 헤어진 뒤 그의 사랑이란 게 ‘폭력’이었음을 절실히 깨달았다.

이별을 고하자 남자는 A씨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카페에 찾아와 무작정 ‘잘못했다’고 매달렸다. A씨가 무시하자 손목을 잡아 끌고 나가 몸에 멍이 들 정도로 폭력을 휘둘렀다.

몸도, 마음도 아팠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남자는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자신의 말을 믿어줄 것 같지 않았다. 이별 사실을 안 부모님이 오히려 날 탓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스스로도 한때 누구나 부러워한 연애를 했다는 주변의 시선이 나쁘지 않았다. 평생 숨기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A씨는 이별 후 1년 정도가 지난 뒤의 어느 날을 떠올리며 남자를 향해 말했다. “널 우연히 거리에서 마주쳤을 때,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숨이 막히고 온몸이 떨렸다. 그때서야 깨달았다. 난 아직도 많이 아프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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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끙끙 앓는 피해자들…헤어져도 괴롭힘은 계속된다

데이트폭력 피해자들은 A씨의 사례처럼 우울감과 불안감, 자기 비하, 죄책감 등 다양한 형태의 정신적 후유증을 겪는다.

17일 한국데이트폭력연구소에 따르면 데이트폭력 피해 경험이 있는 638명(중복답변) 가운데 20대 여성의 49.3%, 30대 여성의 48.4%가 우울감을 느꼈다. 자존감이 하락됐다고 답변한 비율도 20대, 30대 각각 44%, 51.6%로 나타났다. 불안감은 44.7%(20대), 40.6%(30대), 분노감은 40%(20대), 46.9%(30대)가 느낀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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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띄는 점은 데이트폭력 후유증으로 약이나 술에 의존하게 됐다는 응답이 20대보다 30대에서 두 배 이상 많았다는 점이다.

20대 여성의 경우 이 같은 응답은 4%였지만 30대 여성은 9.4%를 기록했다. 이는 30대 여성이 20대 여성에 비해 피해 사실을 적극적으로 외부에 알리지 못하고 스스로 감내하고 있는 현실을 시사한다. 실제로 이번 연구에서 데이트폭력 이후 어떤 형태로라도 조치를 취하는 경우를 살펴보면 20대가 47%로 나타났지만 30대는 39%에 불과했다.

연구소 관계자는 “부모와 학교 등의 보호를 받는 20대와 달리 30대 여성의 경우 직장인이 많을뿐더러 사회적 평판 등으로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어려워한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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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트폭력이 발생하는 시점에 피해자들의 대응방식은 대부분 소극적이었다. ‘상대방에게 더 이상 하지 말라고 구두로 경고했다’고 답한 비율이 20대 75.7%, 30대 72%로 가장 많았다. 이별을 요청한다는 답변은 20대, 30대 모두 60%로 뒤를 이었다. 그러나 경찰신고, 전문기관 방문 등의 적극적 조치는 20대 15.8%, 30대는 8%에 불과했다.

어렵게 관계에서 벗어났다고 해도 피해자들의 두려움은 지속된다. 이별 후 협박, 스토킹 등 가해자의 지속적 괴롭힘이 뒤따르고 온라인이나 수사기관에서의 ‘2차 피해’를 호소하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최승원 덕성여대 심리학과 교수는 “여성 피해자들 상당수는 이미 관계에 익숙해져 독립하겠다는 의지가 부족하거나 이별 이후 일정기간 지속될지도 모르는 위협 등을 감수해야 한다는 부담에 시달리고 있다”며 “폭력의 징후가 보인다면 주변에서라도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분위기가 정착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민순 기자 soo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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