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폭위 제도의 딜레마… 예방효과는 없고 교사·학생 피로감 가중
학폭담당 교사의 하소연
사건 터지면 그때마다 각종 서류양식만 11가지
학부모 감정 다툼까지 담당 교사가 떠맡기도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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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법원인지 학교인지 모르겠어요. 차라리 학교에 변호사 사무실을 차리자는 말까지 나옵니다." 서울 한 고등학교 학교폭력 담당교사 A씨의 하소연이다. 전교생 1000여 명인 이 학교의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학폭위) 업무는 A씨 혼자 맡고 있다. 올 들어 열린 학폭위만 네 건. 그때마다 A씨는 교육청에 보내는 학교폭력사안 접수 보고서, 피해·가해·목격 학생에게서 각각 받는 학교폭력 확인서, 학폭위원들에게 보내는 위촉동의서·임명장 등 서류 작업에 매달려야 했다. 한 번 학폭위가 열릴 때 필수로 작성하는 양식만 11가지다.
학부모 민원은 덤이다. A씨는 "집안 형편이 어려운 가해 학생 어머니에게 피해 학생 어머니가 '어느 아파트 사느냐'며 깔보는 듯한 말을 해 양 부모 사이에서 감정 싸움을 해결하는 역할까지 맡아야 했다"며 "피해 학생 부모는 축소·은폐한다고 항의하고 가해 학생 부모는 처분이 가혹하다고 항의하니 서류 작업만 끝낸다고 전부가 아니다. 학폭위 결과를 통보해도 이에 불복해 재심청구나 소송이 들어올까 봐 항상 조마조마하다"고 했다.
학부모 민원에 소송 불안까지
지난 2012년 각 학교에 도입된 학폭위 제도가 교사들의 행정 업무 피로감을 가중시키고 정작 학교폭력 예방 효과는 미미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현재 교육 당국에서는 사소한 괴롭힘이나 장난이라고 여길 수 있는 행위도 학교폭력으로 규정해, 교사가 이를 알았을 경우 24시간 이내 교육청에 보고하고 2주 내에 학폭위를 열도록 하고 있다.
학교폭력 관련 업무는 교사들의 '폭탄'이 된 지 오래다. 지난해까지 생활지도부장을 맡았던 서울 경신중 고광삼 교사는 "한 해 더 있으면 송사 걸릴 게 뻔한데 더 생활지도부장을 맡고 싶지 않았다. 학부모 민원과 재심에 시달리다 보면 정작 교과 업무는 뒷전이 된다"고 했다. 기간제 교사 B씨는 "학교폭력 담당 업무는 신규 기간제 교사 몫이다. 나이든 교사들은 힘든 업무라고 기피하고 낮은 연차 정교사는 담임을 맡으니 새로운 기간제 교사가 오면 그에게 폭탄을 돌리는 식"이라며 "남고생들이 흔히 쓰는 비속어도 들은 학생이 문제를 제기하면 학폭위를 열 수밖에 없다. 학교에서는 나중에 은폐했다고 문제가 될까봐 형식적으로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학폭위 처분에 불복해 피해·가해 학생 측이 재심 청구한 건수는 지난해 1299건. 학폭위 처분과 관련한 행정소송 건수도 2012년 50건에서 2015년 109건으로 늘었다.
올해 초 수도권 한 고등학교에서는 피해 학생 어머니가 찾아와 "가해 학생 부모와 금전 합의를 했으니 학폭위를 열지 말라"고 한 일이 있었다. 알고 보니 피해 학생이 친구 어머니와 짜고 벌인 짓이었다. 친구 어머니를 학교에 데려와 학폭위를 무산시킨 뒤 함께 가해 학생을 찾아가 합의금을 받아내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해당 학생의 어머니를 알고 있던 교사 덕분에 이들의 계획은 무산됐다. 이 밖에도 피해 학생 부모가 "심리상담 비용 회당 30만원씩 20회, 총 600만원을 배상하라", "이 하나가 빠졌으니 1000만원을 배상하라"는 식의 중재를 교사에게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교사가 물리적 위협에 노출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지난해 8월 강원 철원에서는 한 남학생이 학교폭력으로 강제 전학 처분을 받자 그 아버지가 찾아와 교감에게 흉기를 휘둘렀다. 지난해 3월 서울 한 초등학교에선 한 학부모가 '우리 애가 학교폭력을 당했다'고 주장해 학폭위가 열렸다. 재심까지 갔으나 '학교폭력 피해 사실이 없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학부모는 하루에 많게는 스무 차례 전화해 담임교사에게 '너 몇 살이야?', '죽여버린다' 등의 욕설·폭언과 함께 성희롱을 했다. 학교 측에선 교권 침해로 판단했지만 딱히 대응하지 못했다.
신고·처벌만 남아버린 학폭위
학교가 폭력을 은폐하거나 축소할 것이라는 우려를 없애고 사소한 괴롭힘도 폭력임을 명확히 하겠다는 애초 의도와는 달리, 신고와 처벌만 남발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 3월 한 초등학교에선 입학한 지 일주일 된 1학년 학생을 상대로 학폭위가 열렸다. 갖고 놀던 장난감을 빼앗아갔다고 친구를 한 대 때렸다는 이유였다. 맞은 학생 부모는 사과를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학폭위가 열리고 아이는 '서면 사과' 처분을 받았다. 해당 학부모는 "우리 아이가 잘못한 것은 맞지만 교육적으로 타이를 수 있는 일 아닌가"라며 "한글 갓 뗀 아이에게 가해자 딱지를 붙이고 사과문을 쓰라니 너무하다"고 했다.
분당 청솔중 정선미 교사는 "학교폭력 사건을 잘 들여다보면 학생들 사이 사소한 갈등이 학폭위에 가면서 부모님 사이 법정 다툼으로 번지게 된다. 이른바 '애들 싸움'은 얽혀있는 모든 반 아이들을 상담해 화해를 주도하면 의외로 좋은 관계로 회복되기도 한다. 화해와 사과로 풀 수 있는 사안도 기계적으로 학폭위로 넘겨버리니 아이들에겐 배움과 성장의 기회가 박탈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학폭위 최고 처분이 퇴학인데 결국 심각한 폭력에 대해서는 학교가 학생을 교화하지 못한 채 학교 밖으로 내치는 꼴"이라고 했다.
과반수를 학부모로 채우는 학폭위원 구성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비전문가들을 위원으로 구성하다 보니 부모들이 처분에 불복하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학교전담경찰관(SPO)이나 변호사를 위원으로 입회시키는 학교도 있지만 상당수 학교에선 현실적으로 어렵다. 한 초등학교 교사는 "한 SPO가 여러 학교를 맡다 보니 시간을 맞추기 어렵고, 변호사를 부르면 예산상 거마비도 주지 못할 때가 있다. 또 세 시간 넘게 학폭위가 이어지기도 하는데 어떤 전문가들이 만사 제쳐놓고 일일이 들어오겠느냐"고 했다. 또 다른 교사는 "학폭위 처분이 생활기록부에 남아 진학에 불리할까 봐 학생이든 학부모든 신경을 쓴다. 정작 진학에 크게 관심 없는 문제 학생들은 학폭위 처분에 눈 하나 깜짝 안 한다"고 했다. 교사 출신인 이보람 변호사는 "내가 가르치는 제자를 내 손으로 처벌하게 하는 점이 학폭위의 큰 모순 중 하나"라며 "사이버 불링이 심각한 요즘은 학생들이 '가해자 휴대폰 압수해서 내 욕했는지 봐달라'고 요구하기도 하는데 교사가 수사권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고 했다. 학교가 사안의 경중을 따지는 권한은 없고 행정처리반으로 전락했다는 얘기가 나오는 배경이다.
학교폭력, 당사자만의 문제일까
선진국에서는 폭력 예방에 학교가 주도적 역할을 하되 사법기관·심리상담가 등 전문가가 긴밀히 공조하고 있다. 미국은 무관용 원칙을 따라 학교폭력을 엄벌하고 경찰이 적극 개입한다. 지난해 말 미국 위스콘신주에서는 학교폭력을 주도한 학생의 부모에게 벌금을 부과하는 법안이 통과되기도 했다. 캐나다 온타리오주는 학교폭력이 잦은 학교에 경찰관을 상시 배치하고 있다. 유럽권은 학교폭력을 사회가 책임질 문제로 인식하고 교육을 강화하는 쪽이다.
전문가 다수는 "우리 사회가 학교폭력을 학생을 교육하는 방향으로 갈지, 아니면 엄벌주의로 갈지 사회적 합의조차 이뤄지지 않았다"며 "엄벌주의로 간다면 교원이 아니라 경찰, 변호사 등 전문가가 학폭위 일을 처리하는 게 맞지 않겠느냐"고 했다. "학교장이나 교사가 교육·상담이 필요한지 처벌이 필요한지를 1차적으로 판단해야 하는데 현재는 손발이 묶인 채 행정 뒤치다꺼리만 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욕설·다툼 등 경미한 사안을 담임이 계도해 자체 해결하는 '담임종결제'는 2014년 교육부가 학교폭력 매뉴얼을 바꾸면서 폐지됐다. 한국교총 김재철 대변인은 "학폭위는 결국 사후 조치이기 때문에 교육 현장에서 어떻게 폭력을 예방해야할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며 "교권이 추락한 현실에서 교사들이 소신을 갖고 학생들을 지도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고 했다.
경기 안산 한 중학교에서 학교폭력 가해 학생을 상담했던 한 교사의 경험담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세월호 참사로 형을 잃은 학생이 있었어요. 지난해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반 여자아이들을 때리거나 성희롱하는 일이 잦아 결국 학폭위에 올렸습니다. 강제 전학 얘기까지 나왔으나 '이 학생을 이 학교에서 잡아주지 않으면 무너질 것'이라는 의견이 나와 집중 상담에 들어갔어요. 몇 개월간 그 학생 얘기를 들어보니 형이 죽고나서 분노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를 찾지 못했던 거죠. 연말이 되자 '내가 화난다고 다른 아이들을 괴롭히면 안 된다'며 스스로 반성하더라고요. 조금만 아이들 시각에서 보면 처벌만이 능사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유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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