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현의 허름해서 오히려] 서울 창신동 '동북화과왕'
서울 창신동 '동북화과왕' / 정동현 |
이불을 뒤집어쓴 채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부모 곁을 떠나 시골 할머니댁에 내려간 초등학교 여름방학 어느 날 밤, 할머니와 동생이 잠든 그 밤에 내가 목격한 것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하얀 여인의 칼춤이었다. 절대 무공을 얻으려고 '규화보전'이란 비책을 익혀 결국 남자에서 여자로 변해가는 이와 그를 사랑한 한 여인, 또 다른 남자의 이 오묘한 삼각관계는 갓 10대가 된 나에게는 충격적인 로맨스였다. 그 영화의 이름은 '동방불패'. 그 이후 수많은 아류작이 나왔지만 이 작품을 뛰어넘는 것은 없었다. 부푼 가슴으로 '동방불패2'를 보았을 때 한눈에도 모형 티가 나는 참치를 타고 바다를 가르며 나타나는 임청하를 목격하고 나는 텔레비전을 꺼버렸다.
근래 한국에 범람하는 양꼬치집들을 보면 그 시절 싸구려 홍콩 무협영화가 떠오른다. 시작은 좋았다. 값은 싸고 양은 넉넉하며 맛도 생경해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 수가 많아질수록 하향 평준화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내놓기 편한 요리만 남고 정작 가짓수는 줄어들었다. 오호통재라! 결국 지척에 널린 양꼬치집들을 버리고 굳이 동대문까지 길을 나서고 만다. 그곳에 가면 동북쪽 훠궈의 왕이라 스스로 이름을 붙인 '동북화과왕'이 있기 때문이다.
'동북화과왕'에 드나들기 시작한 것은 벌써 10여 년 전, 말도 잘 통하지 않고 분위기도 삭막한 이 집에 처음 와 어색해했던 것은 왕(王)자가 붙은 붉은 간판도, 외국인지 한국인지 구분할 수 없는 언어 때문도 아니었다. 개구리다리, 개고기, 양고기 같은 재료와 알아먹을 수 없는 요리명에 마치 오지로 해외여행 온 것 같았다. 그러나 메뉴판에 모두 사진이 붙어 있으니 두려워할 것 없다. 인원이 꽤 된다면 만주에서 비롯됐다는 샤브샤브의 일종 훠궈(火鍋)를 시키는 게 좋다. 은은히 초원의 향기가 나는 양고기를 붉은 탕에 넣어 먹으면 뜨거운 맛에 온몸이 달아오른다. 훠궈 말고도 이 집 메뉴는 수십 가지다. 그중에서 시작은 단연 '황과라피'<사진>라고 부르는 오이양장피무침(1만원)이다. 주문을 받아 바로 무쳐내니 맛을 흐리는 물이 생기지 않고 기분을 상쾌하게 만드는 신맛은 새초롬하게 입안을 쏘아 침이 저절로 흐른다. 양장피는 그 신맛을 타고 팔딱거리는 생물처럼 탱글탱글 씹혀 먹는 재미를 더한다. 두부피에 고수를 넉넉히 올리고 잘게 채썰어 볶은 돼지고기와 함께 싸먹는 '경장육사(1만5000원)'를 보면 이 집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칸딘스키 추상화처럼 딱 떨어지는 원과 사각형, 직선으로 이루어진 이 음식은 담백하고 물리지 않아 배를 채우기 좋다. 누가 이 요리를 시킬까 싶지만 '옥수수튀김(1만3000원)'의 남다른 맛도 이 집을 찾는 또 다른 이유다. 전분가루 입혀 튀기듯 구워낸 옥수수전에 어우러진 소금과 설탕의 균형은 짜지도 달지도 않은 또 다른 맛을 만든다. 그 조화가 무협지 속 비기처럼 손에 잡힐듯 잡히지 않아 한번 잡은 젓가락을 놓을 수 없다.
매번 올 때마다 대륙의 기상에 힘입은 듯 한 상 가득 음식 시켜놓고 국화향 나는 백주를 엄지손가락만 한 잔에 담아 고개를 뒤로 젖힌다. 창밖으로 뿌옇게 비치는 간판의 왕(王)자가 보이고 독한 술이 위장을 훑으면 그 옛날 술병째 콸콸 부어 마시던 임청하의 창백한 얼굴이 아른거린다. 아찔한 찰나의 백일몽! 그런 나를 깨우는 것은 칼소리처럼 쨍하고 울리는 맑은 술잔의 노래다.
[정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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