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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 (일)

[김정운의 麗水漫漫] 꼬이면 자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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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삶, 질투와 열등감 빼면 설명하기 어려워

괴롭다고 남 탓 하는 건 가장 게으른 해결 방식

'마음에 박힌 대못'이라 여기고 성찰의 계기 삼아야

조선일보

김정운 문화심리학자·나름 화가


나는 유시민 작가가 몹시 불편하다. TV를 켜면 매번 그가 나온다. 그의 '구라'는 갈수록 현란해진다. 게다가 그가 쓴 책까지 모조리 잘 팔린다. 그게 나는 그냥 힘든 거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 훨씬 잘 생겼다! 그건 누가 봐도 그렇다. 유시민 작가는 이렇게 아주 간단히 제쳤다. 내 책이 베스트셀러 명단에 올라가면 꼭 새 책을 내서 내 책을 끌어내리는 혜민 스님은 좀 다른 방식으로 따돌렸다. 그는 '스님'이고 나는 '남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마음이 좀 나아졌다. 비겁해도 할 수 없다. 내 마음의 평화가 먼저다.

뜬금없지만 요즘은 이상순이라는 사뭇 촌스러운 사내가 날 괴롭힌다. 이효리 남편이란다. 참 선하고 따뜻해 보인다. 모난 성격 탓에 시종일관 부딪치며 살아왔던 나는 '부드러운 사내'만 보면 마음이 몹시 불편해진다. 그러나 이 경우 내 비장의 '인물론'은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그의 아내는 이효리다! 그걸로 그냥 '게임 끝'이다. 아무리 비겁한 논리를 들이대도 해결되지 않는 이상순에 대한 내 질투는 이제 내 성격적 열등감을 건드린다.

우리의 인생이 자주 꼬이는 이유는 '질투'와 '열등감' 때문이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이다. 질투가 외부를 향한다면 열등감은 내부를 향해 있다. '열등감(Minderwertigkeitsgefühl)'을 인간 행동의 중요한 설명 기제로 끌어들인 사람은 알프레트 아들러(Alfred Adler)다. 성적 욕망의 좌절과 억압으로 일관하여 설명하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반기를 들며 내세운 개념이다. 프로이트의 '콤플렉스(Komplex)'와 아들러의 '열등감'은 지난 백 년간 대립해왔다.

우리나라에서 수백만 부가 팔린 '미움받을 용기'는 바로 아들러의 이론을 대중적으로 해설한 책이다. 좋은 책이긴 하지만 그렇게 팔릴 정도로 엄청난 책은 아니다. 내가 직접 감수하고 추천한 책이라 하는 이야기다. 느닷없는 '아들러 열풍'은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그만큼 열등감으로 힘들어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열등감을 생략하고 오늘날 한국인의 집단 심리를 이해하기는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조선일보

인생이 자꾸 꼬이는 이유. /그림 김정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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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도 프로이트나 아들러 모두 '유대인'이라는 열등감에 시달렸다. 내 일상의 유치한 열등감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이다. 매일같이 경험하는 인종차별로 인한 뿌리 깊은 열등감의 상처를 유대인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해결했다. 우선, 독일인보다 더 철저한 '독일인'이 되는 방식이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가스를 개발한 유대계 독일인 프리츠 하버(Fritz Haber) 같은 이다. 암모니아 합성비료를 발명한 그는 자신의 발명품이 독가스로 사용되는 것에 적극 동조했다. 그의 아내는 이를 반대하며 자살까지 했지만 막을 수 없었다. 그의 독가스는 결국 히틀러에 의해 자신의 유대인 친척까지 살해하는 데 사용되었다.

두 번째는 시오니즘이다. 유럽에서 그토록 멸시받느니 스스로를 격리하여 '유대 국가'를 세우자고 오스트리아 빈의 유대계 작가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은 부르짖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오늘날까지 여전히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팔레스타인 문제의 기원이 된다. 시오니즘은 주로 '동유대인(Ostjuden)'이라 불렸던 동유럽 출신 유대인들에 의해 지지되었다. 그러나 시오니즘이라는 인종 갈등 뒤에는 가난한 '동유대인'과 부유한 '서유대인(Westjuden)' 사이의 계급 갈등이 숨겨져 있었다. 1980년대 한국 사회의 '계급 모순'과 '민족 모순'을 둘러싼 논쟁처럼 20세기 초반의 유대인 문제는 하나의 차원으로 환원될 수 없는 아주 복잡한 문제였다.

독일인이 되기도 거부하고, 히틀러식 인종주의의 또 다른 극단인 시오니즘도 거부하며 '평화로운 유럽인'이 되고자 했던 유대인들도 있었다. 프로이트와 아들러는 물론, 카를 크라우스, 발터 벤야민, 프란츠 카프카, 슈테판 츠바이크와 같은 이들이다.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는 이들의 깊은 인문학적 사유의 원천은 이들이 끝까지 부둥켜안고 씨름해야 했던 '유대인 열등감'이다. 유대인이 위대한 이유는 노벨상을 많이 받아서가 아니다. 인종적 열등감을 풍요로운 상상력의 원천으로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열등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적'을 만드는 것은 가장 게으른 방식이다. 내면을 향한 칼끝을 바깥으로 향하는 것이다. 어떤 사회 이슈든 양극단에 치우친 이들의 이해하기 힘든 공격성과 적개심에는 이 같은 '투사(Projektion)'의 메커니즘이 숨어 있다. 부와 권력을 한 손에 쥐고도 여전히 적을 만들어야 마음이 편해지는 이들이다. 그러다 죄다 한 방에 훅 간다. 열등감은 외부로 투사하여 적을 만드는 방식으로는 결코 극복되지 않는다. '적'은 또 다른 '적'을 부르기 때문이다. 타인들과 공동체를 이뤄 살아가는 한 열등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마음속에 깊이 박힌 대못'처럼 그저 성찰의 계기로 품어야 한다.

지금 마음이 몹시 불편하고, 모두가 '구조'의 문제이거나 '네 편'의 문제로만 생각한다면 방법론으로서의 '심리학적 환원주의'를 취할 필요가 있다. 내면의 뿌리 깊은 질투와 열등감이 '정의'라는 정당화의 겉옷을 입고 있는 것은 아닌지도 살펴봐야 한다. '내 마음'의 문제는 쏙 빼놓고 사회 문제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참으로 염치없는 짓이기 때문이다. 이는 지난 몇 년간의 '아들러 열풍'을 바라보는 심리학자의 뒤늦은 설명이다.

어쨌거나, 꼬이면 자빠진다!

[김정운 문화심리학자·나름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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