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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6 (토)

이회창 “박근혜 내가 정계입문 시켰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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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정치BAR_이회창, 회고록서 역대 대통령 평가

“YS의 회고록은 사실과 달라”
“DJ는 무능·무책임…실패한 정치인”
“노무현, 불법 정치자금 단절에 기여”
“박근혜, 대통령 되리라곤 미처 몰랐다”


“내가 성공한 사람이라면 자신 있게 쓰겠는데 실패한 사람이라서 안 쓰려고 했었다. 그러나 제가 있던 한나라당, 야당으로서의 역사가 잊혀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지들과 야당의 역사를 남길 필요가 있겠다고 판단했고, 내가 아니면 누가 이걸 쓰겠느냐고 생각했다.”
- 8월22일 세종문화회관 회에서 열린 이회창 한나라당 전 총재 회고록 출판기념 기자간담회


세차례 대선에서 고배를 마신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22일 자신의 정치인생을 담은 회고록을 출간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시종일관 담담한 어조로 자신의 대선 도전 실패를 “내 잘못이지 다른 누구의 탓도 아니다”고 돌아봤다. 회고록 전반이 차분한 어조였지만 자신이 연거푸 대선에서 고개를 떨군 뒤 지켜본 역대 대통령들을 평가하는 대목에선 온도 차를 보였다. 자신과 대척점에서 치열하게 대선에서 경쟁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실패한 정치인’인으로 평가했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에 대해서도 “정치공학적 야합”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에 대해 “대기업이 정치인들에게 대선 자금을 제공하던 과거의 관행을 끊는 데 노 전 대통령이 기여한 바가 크다”고 하는 등 역대 대통령의 ‘과’만 아니라 ‘공’에 대해서도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자신을 정치권에 입문시킨 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애증의 감정을 여과 없이 표출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대통령이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며 쓴소리를 던졌다. 회고록을 통해 그의 ‘역대 대통령 평가’를 살펴본다.

애증의 YS(김영삼 전 대통령)

한겨레

지난 1996년 1월22일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신한국당에 입당한 이회창 전 국무총리를 청와대에서 만나 손을 잡고 있다. e영상역사관(정부기록사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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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날 그의 말을 듣고 허풍이 아니라 기성 정치인에게서는 보기 드문 이상주의자의 풍모를 발견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중략) 그는 동물 같은 정치적 후각을 가졌으면서도 약간의 이상주의자적 면모도 아울러 가지고 있는 정치인이었다”

1993년 대법관으로 있던 자신에게 감사원장직을 제의하던 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한 이회창 전 총재의 첫인상이다. 그는 당시를 “이 결단(감사원장직 수락)은 나에게는 운명의 갈림길이었다. 이 결단으로 나는 김영삼이라는 한국 현대 정치사의 주역인 한 사람과 참으로 굴곡 많고 애증이 엇갈리는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라고 돌아봤다.

그는 회고록에서 자신을 정치권에 입문시킨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뒷이야기와 불편한 감정을 회고하는 데 많은 분량을 할애했다. 특히 1994년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갈등 끝에 당시 국무총리직을 사퇴하기까지의 과정에서 느꼈던 불편한 감정을 표출한 부분이 눈길을 끈다. 그는 “나는 때때로 그와 충돌했고 총리직을 사퇴하기까지 했으며, 여당 대표로 있을 때는 당 총재인 김 대통령에게 탈당을 요구하기도 했다”며 “사퇴 이후 청와대 및 민자당 측에서는 별의별 유치한 인신공격성 발언을 일제히 쏟아내기 시작했는데 (중략) 그때의 비방, 비난은 전혀 근거가 없는 쓰레기 같은 모략 중상이었다”, “일부 일간지 보도한 내용을 보면 기가 막혔다”고 적었다. 지난 2001년 김영삼 전 대통령이 펴낸 회고록에 기술한 내용에 대해서도 불쾌한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회고록1> 422~424쪽
불쾌한 일은 또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이 퇴임한 후 회고록을 냈는데, 그 회고록에서 나의 국무총리 사퇴에 관한 부분을 보니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혔다. 요지는 면담 때에 나에게 책임을 추궁하자 내가 “잘못했으니 한번만 기회를 주십시오”라면서 시종일관 변명을 했고, 또 나에게 지금 당장 사표를 내지 않으면 대통령으로서 헌법에 따라 해임 조치하겠다고 호통을 쳤다는 것이다. 그밖에도 면담 후 내가 박관용 비서실장을 찾아가 여러가지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고도 써놓았다. 어떻게든 나를 깎아내리려는 이런 사실과 다른 회고록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대꾸하는 것 자체가 불쾌하지만 이것은 나의 명예에 관한 것이므로 분명히 해두려 한다. (중략) 나는 김 대통령에게 통일안보정책 조정회의에 관한 총리의 조치가 정당한 것이었음을 적극 설명했다. 그러나 그는 전혀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당초 생각해둔 대로 사의를 표명했던 것이다. 내가 사과했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 그가 나에게 사퇴하라거나 해임하겠다는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중략) 대통령의 회고록은 사실과 다르다.


“디제이(DJ·김대중 대통령)는 실패한 정치인”

한겨레

1998년 11월10일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를 만나 악수하고 있다. e영상역사관(정부기록사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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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대 대선에서 1.6%포인트 차로 패배한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실패한 정치인”이라고 평가했다. 이 전 총재는 “디제이 정권은 결코 성공한 정권으로 볼 수 없다. 반세기 만에 진보·좌파 정권을 쥐어본 국민에게 무능함과 무책임함만을 각인시켜줬다”고 비판했다.

또 자신의 결정적 패인인 ‘디제이피(DJP·김대중 대통령, 김종필 전 총리)연합’에 대해서는 “야합이지만 선거에 이기는 신묘한 수임은 틀림없고 나는 완벽하게 패한 것이다. 선거에 이기기 위한 야합이 정권에 부담되거나 족쇄가 되고 국정 수행에 지장을 받았다면 성공한 정치인이라고 할 수 있겠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대중 후보는 임기를 포기하고 내각제로 개헌할 의사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김종필 총재를 속인 셈이다. 국가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실패한 대통령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자신의 패배에 대해서는 “전 적으로 내 탓이다”라고 몸을 낮췄다.

◎<회고록2> 207쪽
다만 DJP 연합에 대해 이것만은 꼭 말해 두고 싶다. 나는 위에서 사후 분석이 내놓은 필패론에 동의하지 않지만, 1.6% 퍼센트(포인트)의 근소한 차이라도 진 것은 진 것이다. 선거에서는 이기고 보아야 한다. 어설픈 정의나 도덕론은 쓸데없다. 이것이 정치의 현실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DJP 연합이라는 선거 연대 자체를 그것이 야합이라는 이유로 그 의미를 부정하지 않는다.

어찌 되었든 그것은 선거의 승패를 가르는 유효한 수단이 되었고 그것을 막지 못한 내가 패자가 된 것은 엄연한 현실이 아닌가. 요컨대 선거에 진 것은 나의 잘못이지 다른 누구 탓도 아니다.


‘노무현 바람’ 곧 꺼질 줄 알았는데…

한겨레

2002년11월15일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전국교육자대회에 참석한 노무현 당시 새천년민주당 대선 후보(오른쪽)와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 후보. 노무현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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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게 또다시 패배의 아픔을 준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변방으로 돌며 전두환 전 대통령 청문회에서 보듯이 뛰어난 언변과 돌출적 행동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내는 정치를 해온 것으로 보았다”며 “이런 사람은 대체로 시대의 흐름이나 변화의 바람이 일어날 때 민감하게 이에 편승해 부상하는 데 능하다”고 평가했다. 이어 “이것은 노무현 후보를 잘 모르는 제삼자의 관찰이므로 잘못 본 것일 수 있겠지만 당시 나는 ‘노무현 부상 현상’은 조만간 깨질 바람이라고 보았다”고 당시의 생각을 털어놨다. 노 전 대통령이 국민통합21의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한 것을 두고도 “바야흐로 정치판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기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막장극으로 치닫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자기 생각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 당선 뒤 검찰이 지난 2004년 3월 불법 대선자금을 수사해 대기업들이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쪽에 823억원의 불법자금을 제공했다는 혐의 사실과 함께 “노무현 후보 쪽에 119억원의 불법 대선자금을 제공했다”고 밝힌 것에 대해 높게 평가했다. 앞서 2003년 12월 노무현 전 대통령은 여야 당 대표들을 만난 자리에서 “우리 캠프에서 쓴 불법 대선자금 규모가 한나라당의 10분의 1만 넘으면 대통령직을 사퇴하고 정계를 은퇴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대해 이 전 총재는 승자가 자신의 몸에도 칼을 댄 것이라고 보고 “잘못된 관행이 사라지는데 노무현 대통령이 기여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회고록2> 534쪽
이렇게 대선 자금 사건은 내 삶에서 나에게 가장 치욕스럽고 뼈아픈 회한을 남겼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대기업이 정치인들에게 대선 자금을 제공하던 과거의 관행은 이제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돌이켜 보면 여기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기여한 바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승자의 대선자금은 건드리지 않는 관행을 깨고 검찰이 자신의 대선자금을 조사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다. 앞일을 생각해야 하는 기업이 승자에 제공한 자금 내역에 대해 사실 그대로 밝히리라고는 기대하기 어렵지만 어쨌든 검찰이 119억원의 노무현 당선자 불법자금을 밝혀낸 것은 과거에 없던 일이다. 이것이 잘못된 관행을 단절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에 나는 이것이 노무현 대통령이 기여한 바라고 생각한다.


“박 대통령 내가 정치 입문시켜”

한겨레

2002년 12월17일 대전에서 열린 제16대 대통령 선거 유세에 함께한 이회창 당시 대선 후보(왼쪽)와 박근혜 의원. e영상역사관(정부기록사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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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 총재는 회고록에 박근혜 전 대통령과의 인연도 소개했다. 박 전 대통령은 1997년12월2일 이 전 총재와 만났다고 한다. 이 전 총재는 “차분하고 침착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부모님이 모두 비명에 가신 참담한 일을 겪었는데도 어두운 이미지는 전혀 없었다”고 박 전 대통령의 첫인상을 기억했다. 박 전 대통령은 “한강의 기적을 이뤄낸 우리나라가 경제난국에 처한 것을 보고 아버님 생각에 목이 멜 때가 있다. 이럴 때 정치에 참여해 국가를 위해 기여하는 게 국가와 부모님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이 전 총재는 “한나라당의 외연을 넓히는 데 좋은 자산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흔쾌히 응낙했다. 그를 정치에 입문시킨 사람은 나”라고 회고했다.

<회고록>197쪽
뒷날의 일이지만 2002년 대선 패배 후 그가 한나라당을 맡아 천막당사로 옮겨 당의 재기를 이루어내는 것을 보면서 그의 정치 입문을 받아들인 내 결정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솔직히 당시 나는 그가 뒷날 대통령까지 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가 (중략) 탄핵당하고 구속까지 되리라고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그는 이후 박 전 대통령의 ‘여의도 정치’ 활동에 대해 “한나라당 총재로 있던 시절 다른 의원들과 섞이지 않고 홀로 움직이면서도 당내 민주화나 개혁 같은 주제를 선점해 당내 입지와 존재감을 키우는 독특한 행동을 보였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후 국정운영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실망하고 기대도 접었다”고 부정적인 평가를 했다. 박 전 대통령이 유승민 전 원내대표를 ‘배신의 정치’라고 비난하며 원내대표직 사퇴를 압박한 것에 대해서도 “(유승민 의원이) 소신을 지키고자 한 것이 왜 배신자인가”라고 꼬집기도 했다. 특히 최순실 게이트 이후 박 전 대통령의 행보에 대해선 “박 전 대통령이 궁지에 몰렸을 때 더 이상 대통령직에 있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국민의 분노가 폭발하기 전에 대통령직에서 하야하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사과를 해야 했다”고 지적했다.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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