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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friday] '靈感'과 함께 사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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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집에 빠진 사진가

집은 '수집품 박물관'

구관서 생활하고 작업, 신관엔 수집품들 채워

새 장식품·빈 상자부터 50년 전 팸플릿도 보관

"물건의 영혼을 훔친다"

수집하며 안목 키웠고 수집품 통해 영감 얻어

세월의 흔적 배어 있고 존재감 있는 물건 좋아해

백자, 그리고 황금

시간이 축적된 피사체 가장 적확한 것이 白磁

인간 욕망의 종착점인 황금에 최근 관심 쏠려

사진가 구본창(64)이 수화기 너머에서 집 주소를 일러주며 "구관(舊館)과 신관(新館)이 있다"고 했다. 빌딩 아닌 주택에, 더구나 주인이 독신인 집에 붙이기엔 어색한 이름이었다. 며칠 뒤 그의 집에 도착해서야 그 표현이 자연스러운 귀결임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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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 구본창은 ‘찍는’ 일뿐 아니라 ‘찍히는’ 데도 능했다. 과한 몸짓을 하는 대신 자연스럽게 미소 지었다. 그런 주인을 닮은 수집품들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중에서 오래된 카메라 가방을 양손에 들고 군복 견장 상자를 찍어 확대한 자신의 작품 앞에 섰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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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경기도 분당 이 집에서 17년째 살고 있다. 구리시에서 소설가 박완서와 이웃해 살다가, 당시 강의 나가던 학교(의왕시 계원예술대)와 멀지 않은 곳을 찾아 2000년에 옮겨왔다. 지하 1층, 지상 3층 집 꼭대기에 거처를 두고 나머지는 스튜디오와 암실 같은 작업 공간으로 만들었다. 이 집이 구관이다.

작년엔 구관 바로 옆에 쌍둥이 건물인 신관을 나란히 짓고 수집품을 채우기 시작했다. 새로운 실험 정신으로 한국 현대 사진의 지평을 넓혔다고 평가받는 구본창에게 수집은 그저 취미가 아니다. 그에게 수집이란 시각적 안목을 키우는 훈련이고, 수집품은 사진가로서 영감의 원천이다. 종목을 가리지 않는 수집벽은 인물, 풍경, 광고, 영화 포스터까지 다양한 장르와 분야를 넘나들어 온 그의 작품 세계를 닮아 있다. 대영박물관(영국), 보스턴미술관(미국), 기메미술관(프랑스), 리움미술관 등이 그의 작품을 소장한 데 이어 이제 집이라는 '인생 박물관'이 만들어지는 중이다.

집, 인생을 담다

―신관, 구관이라니 꼭 박물관 같다.

"전시를 40번 넘게 하다 보니 작품도 쌓이고, 다른 작가들과 관련된 자료도 많다. 이제 뭐가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 인벤토리(소장품 목록)를 정리해보고 싶은데 공간이 넉넉지 않았다."

―한두 해 모은 물건이 아닌 것 같다.

"시작은 국민학교 때였을 거다. 내성적이었고, 밖에 나가 노는 걸 두려워했다. 대신 말 못하는 동식물이나 물건에 애정을 느꼈다."

―수집품의 장르가 다양하다.

"종류를 가리지 않는다. 여러 가지 장식품, 인쇄물, 신문 스크랩도 엄청나게 많다. 해외 출장이 잦았던 아버지가 일본에서 가져오신 1964년 도쿄 올림픽 카탈로그가 너무나 아름다워 서랍에 간직한 게 지금까지 있다."

―그래도 더 끌리는 물건이 있을 텐데.

"공장에서 똑같이 찍어내는 건 재미가 없다. 값나가지 않더라도 유니크하고, 세월의 흔적이 배어 있어야 하고, 비록 지금 비어 있어도 한때 충만했을 존재감이 느껴지는 물건이 좋다."

―공간은 생각보다 수수하다.

"멋지게 지으려면 공간을 포기해야겠더라. 중정(中庭)을 만든다든가 두 개 층을 튼다든가…. 그러면 뭔가 보관하는 데는 불리한 게 많아서 그냥 평범한 스퀘어(사각형)로 했다. 신관은 지하와 1층을 갤러리로 하고 2·3층은 수집품의 아카이브를 만들 생각이다."

가장 먼저 3층에 올라가니 세계 각국의 새 장식품이 진열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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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창이 ‘미련’을 가지고 있다고 했던 새 장식품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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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

"새에 대해서는 '미련'이 있다. 어릴 적 할아버지 제삿날에 어머니가 밥 지은 솥뚜껑을 열어 안을 보여주셨는데, 물이 끓으면서 쌀이 살짝 일렁인 모양이 꼭 새가 지나간 발자국 같았다. 할아버지가 새가 돼서 오신 거라는 어머니 말씀을 그때 들은 뒤로 새는 누군가의 혼을 지닌 듯 느껴진다."

2층으로 내려와 벽장 문을 열자 이번엔 바이올린 몸통처럼 둥글둥글한 종이 상자들이 나왔다. 옛날 프랑스에서 군복의 견장(肩章)을 담던 이 상자들은 구본창의 피사체가 되기도 했다.

사진, 영혼을 훔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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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장에 들어찬 각종 상자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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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집벽이 작품에도 영향을 주나.

"우선 수집품을 찍는 경우가 있다. 상자도 그랬고, 쓰다 남은 비누를 모아뒀다 촬영한 연작도 있다. 물건에서 발견하는 색감의 조화라든가 질감, 형태 같은 것들도 다음 작업의 단서가 된다."

―단지 피사체를 모으는 것은 아닐 텐데.

"물건을 좋아하는 것은 보는 훈련이다. 물건의 매력을 발견하는 연습을 통해 인물 사진에서도 얼굴에 축적된 시간을 볼 수 있다. 그걸 찾아내 보여주는 희열이 있다. '영혼을 훔친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인물이 아닌 사진에서도 비슷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시간이 축적된 느낌의 피사체를 한때 찾아다녔다. 프랑스에 갈 때마다 낡은 상자를 샀고, 빈 차고(車庫) 사진도 찍었다. 그러다 도달한 것이 백자(白磁)다. 여백의 미가 있고, 비었으면서도 뭔가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듯한 물건이 바로 백자라는 걸 깨달았다. 백자 작업을 시작하던 2004년에 마침 오랫동안 머릿속을 맴돌던 수수께끼도 풀렸다."

―수수께끼?

"오래전에 어떤 외국 노부인이 달항아리 옆에 앉은 사진을 보고 우리 백자의 아름다움에 감탄한 적이 있다. 그 뒤로는 사진은 분명 떠오르는데 어디서 봤는지는 도무지 기억이 안 났다. 2004년 오사카 동양도자미술관에서 백자를 촬영하며 큐레이터에게 그 얘길 했더니 '이 사진 아닌가요?' 하면서 1989년 전시 도록을 보여줬다. 영국 도예가 루시 리가 달항아리 옆에 앉은 바로 그 사진이 실려 있었다."

―달항아리가 영국까지 간 것인가.

"루시 리의 스승이었던 도예가 버나드 리치가 일제 강점기에 일본 미술평론가 야나기 무네요시와 함께 한국에 왔다가 사갔다고 한다. 2차대전 때 런던이 공습을 받자 루시 리의 교외 집으로 항아리를 옮겼고 나중엔 대영박물관에 소장됐다. 결국 대영박물관까지 가서 그 백자도 촬영할 수 있었다."

백자 사진이 걸린 1층을 거쳐 지하로 내려가니 금빛을 담은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최근 집중하고 있는 주제는 황금이다.

―백자와 황금은 정반대 느낌이다.

"금은 인간 욕망의 종착역이라는 점이 흥미로웠고, 반짝이는 것에 힘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피사체로 금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호주의 금광 지역에서 사금(沙金)도 찍어봤고, 페루 리마의 박물관에 부탁해 잉카 유물을 시리즈로 촬영해오기도 했다. 우리 금관(金冠)도 찍고 싶은데 허가를 못 받았다. 우선 관광객에게 허용된 범위 안에서, 진열장 밖에서 반사되지 않도록 여러 장 찍어 합성했다."

경영학도, 사진가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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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갤러리에서 돌 사진을 펼쳐보여주는 구본창.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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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때 전공은 경영학이었다.

"연세대 경영학과를 나와서 대우실업 무역부에 입사했다. 상사가 퇴근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회식에 몰려가는 생활이 견디기 어려웠다. 6개월쯤 다니다 그만두고 독일 유학을 떠났다."

―왜 사진을 택했나.

"미술은 전부터 공부하고 싶었지만 사진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못 했다. 여러 과목을 두루 배우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전공을 정했는데, 사진은 결과물이 빨리 나온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당시 친해진 독일 친구가 사진을 잘 찍어서 친구 따라 강남 간 측면도 조금 있다."

―여러 장르를 넘나들었다. 그걸 관통하는 주제의식은 무엇인가.

"나는 사진 안에 내가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배우 사진을 찍을 때 나는 깔깔거리는 장면은 잘 찍지도 고르지도 않는다. 인물이든 정물이든, 침묵 속에서 어떤 이야기를 끄집어낼지가 나의 주요 관심사다."

구본창(具本昌)

1953 서울 출생
1975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1980~1985 함부르크 국립 조형미술대학교 사진 디자인 전공
1999~2001 계원조형예술대학 사진학과 교수
2001 ‘구본창 사진전’(서울 로댕갤러리)
2008 대구사진비엔날레 전시 총감독
2010 ‘Plain Beauty’(미국 필라델피아 미술관)
2014 ‘구본창의 아카이브: 18개의 전시’(국립현대미술관)
2010~ 현재 경일대학교 사진영상학부 교수

[채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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