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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7 (월)

京城 모던걸, '못된걸'로 비난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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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치·허영·음란…

기존 질서 위협하는 신여성에 '불량' 낙인

당시 표기법 살려 경성 생생하게 그려

조선일보

불량소녀들 | 한민주 지음|휴머니스트 | 492쪽|2만4000원

지금이야 '모던걸'의 부정적 뉘앙스가 희석됐지만, 식민지 경성의 '모던껄'(당시 표기)에게 세상은 가혹했다. 1920년대부터 쓰인 '모던걸'은 끼니보다 비싼 커피를 마시는 '된장녀', 남성의 일방적 희생을 요구한다는 '김치녀' 같은 비하 표현의 대선배 격. 시쳇말로 숨만 쉬어도 사방에서 비난이 쏟아졌다. 진고개 일대에서 커피를 마셔도, 영화관에서 영화를 봐도, 심지어는 좋은 옷을 차려입었다는 것만으로도 공격당했다. 당시 신문들은 이들의 행태를 '서울의 눈꼴틀리는 것' '학교다니는 메누리(며느리)' 같은 연재로 고발했다. 나비처럼 유행만 따라다니고(서울의 눈꼴틀리는 것) 학교에서 요리를 배웠다면서 조선 요리는 못 만들어 시어머니 배를 곯게 하는(학교다니는 메누리) '못된걸' 들이었다는 것이다.

"자랑 잘하는 '모던-껄'들은 돈만 잇스면 아모라도 좃타"하고 "배우라는 글은 안 배우고 애만 배고 오는" 존재이다. '혼자 잘 차려입고도 거지를 만나면 한 푼을 안 내는 깍쟁이'에 '칵테일과 아이스크림을 여러 그릇 비우고도 돈 한 푼 안 내고 남자에게 지불을 맡긴다'는 얘기까지. 황금만능주의에 빠진 채로 자유로운 성생활을 즐긴다는 묘사다. 서강대 국문과 박사 출신인 저자는 1920~1930년대 주요 국내 매체 보도를 인용하며 근대교육을 받은 신여성이 '불량소녀'로 규정되는 역사를 추적한다. 1100개가 넘는 각주(脚註)가 연구 밀도를 짐작하게 한다. 풍부한 인용으로 시대극처럼 당시 풍경을 세밀하게 재구성했다.

조선일보

‘모던걸’은 ‘못된걸’이자 ‘불량소녀’였다. 기존 질서를 위협했던 이들에게 사회는 ‘불량’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사진은 대표적인 ‘모던걸’이었던 무용가 최승희가 1936년(추정) 조선호텔 양식당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모습. 서울웨스틴조선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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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모던걸'이 조선판 '마녀'였다고 분석한다. 식민지 사회와 가부장제 사회가 신여성에게 '불량'이라는 굴레를 씌우고 이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근대적 변화를 받아들이기보다는 기존 질서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규정하고 거듭 비난했다는 주장이다. 신여성은 이런 낙인에 저항했지만 울림은 크지 않았다. '모던걸'은 단발머리를 했으니 '모단(毛斷)걸'이냐, "연애만 하여도 신여성이오. 단발만 하여도 신여성이오. 이혼만 하여도 신여성"이라는 볼멘소리가 나왔다. 그러나 '모던걸'이 허양과 사치에 빠진 이기적이고 문란한 존재라는 전방위적 공격은 거셌다. 근대사회 일원이 되기를 꿈꿨던 여성들은 '불량의 아이콘'이 됐다. 저자는 '별곤건' '매일신보' 등 여러 매체의 기사와 만문만화 등을 통해 그 그림을 짜맞춘다.

대표적인 사례는 1925년 한 신문의 만화. 여기서 '소위 신여성'은 드러누워 담배를 피우며 '피아노' '연애' '돈' '자동차' '미남자' '미국 유학생' '사치' '음난'만을 떠올리는 '불량소녀'로 그려진다.

이렇듯 신여성에게 쏟아진 공격이 21세기 한국 여성에게 쏟아지는 공격과 흡사하다는 점은 섬뜩하다. 당시 경성에서 여학교를 다니면 결혼이 힘들어진다는 보도는 지금도 외국 유학 경험이 있는 여성은 암암리에 '결혼 시장'에서 홀대받는 모습과 닮았다. 경성이 외국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끼니보다 비싼 커피를 마신다고 흘겨보는 것도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1920~1930년대와 현대의 '여혐'의 뿌리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전(全) 사회가 웃음거리로 삼고, 공격하고, 흘겨봤던 '불량소녀'들은 어떻게 버텼는가. 책은 이 '쎈 언니'들에게 쏟아지는 공격에 집중하면서 이들의 활동이 여성의 사회적 지위 상승으로 어떻게 연결됐는지는 충분히 설명하지 않는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100년 전보다 진일보했다. 고리가 하나 빠진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아쉬움 속에도 빛나는 책의 미덕은 당시 표기법 그대로 인용한 관련 보도들에 있을지도 모른다. "전에는 눈만 내노터니 지금은 눈만 가린다"(안경 낀 여성을 비꼬는 표현) "떼파트 쇼-윈도의 황홀한 색채가 나를 유혹하고 울트라 모-던니즘을 숭배하는 젊은 남녀의 야릇한 채림새가 내 호기심을 끈다."(백화점 묘사) 등. 경성의 정취가 글로 살아난다. "요사히 여자들의 운동열은 팽창하고 청년들은 모두가 문약파가 되어가기 때문에 남자는 여자의 손목에 껄려다니게 된 모양" 같은 주장이 당시에 벌써 나왔다는 것도 흥미롭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당시의 취재 방법도 잔재미를 준다. 일반인을 몰래 따라다니면서 '미행' 취재, 요즘 체험 기사의 효시격인 '변장' 취재, 거기서 한 발 더 나가 빵 장수로 변장한 기자를 독자가 찾아내면 상금을 주는 이벤트 등. 논문이나 마찬가지인 책에 톡톡 튀는 사례들이 생동감을 준다.

[양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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