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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태평로] 진보 정권과 노조가 만났을 때 생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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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격차·일자리 문제 해결에 정규직 노조 양보 필수지만 비정규직 돕는 척 생색만 내

獨·伊 진보 정권 때 勞政 협력… 노동 개혁 성공했는데 우리는 "촛불 빚 갚으라" 정부 압박만

조선일보

김민철 사회정책부장


〈문제1〉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1일 일자리위원회 회의를 첫 주재하면서 "요즘 노동계에서도 국민들 안심시키고 희망을 주는 좋은 소식이 많이 들려온다"며 ①~③ 세 가지 사례를 들었다. 이 중 '희망을 주는 좋은' 사례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공공기관노동조합대책위가 성과연봉제 인센티브로 받는 금액 약 1600억원을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와 청년 일자리 창출에 쓰자고 정부에 제안했다.

②보건의료노조가 대의원대회에서 정규직 임금 인상을 억제하고 그 재원을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과 신규 일자리 창출에 사용하기로 의결했다.

③현대·기아차 노조 등 금속노조가 정규직 노동자와 사측이 절반씩 출연해 일자리연대기금을 조성하자고 제안했다.

④마땅한 사례 없음.

문 대통령의 말을 듣고 노동계의 새로운 흐름을 놓친 것이 아닌가 싶어 세부 내용을 살펴보았다. 먼저 ③번 사례에 대해서는 이미 대통령 발언 전날부터 황당하다는 비판이 있었는데 어떻게 대통령 '말씀자료'에 들어갔는지 의아했다. 비판의 핵심은 노조가 부담하겠다는 2500억원의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현대·기아차 노조 등이 제안한 5000억원 중 2500억원 재원은 현대차그룹과 진행 중인 통상임금 관련 소송가액 중 일부인데, 한마디로 받을 가능성이 낮은 돈이다. 자신들이 내겠다는 돈은 한 푼도 없다. 그럼에도 큰 양보를 하는 것처럼 얘기하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다는 얘기였다.

① 사례도 좀 애매하다. 1600억원은 성과연봉제 조기 도입으로 113개 공공기관의 직원 18만명이 받은 돈이다. 그런데 정부 방침대로 성과연봉제를 폐지할 경우 반납해야 할 돈이다. 반납하면 다시 국가 예산인데 그걸 자기들 돈인 것처럼 얘기하는 것이 맞는 말인지 헷갈린다. 더구나 일부 공공기관 직원들은 "기지급한 인센티브를 토해내라는 말이냐"며 반발하고 있어서 성사 가능성도 불투명하다.

② 사례는 더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 기사를 검색해보니 보건의료노조가 지난 5월 대의원대회에서 올해 임금 총액 7.4% 인상을 요구하기로 했다는 기사가 먼저 보였다. 임금 인상을 억제하기로 했다는 내용과 정반대였다. 어떤 말이 맞는지 보건의료노조에 전화해보니 "그렇지 않아도 대통령 발언 이후 문의가 많은데, 우리는 (정규직 임금 인상을 억제해 500억원을 모으자고) 말한 적이 없다"는 취지로 말했다. 이에 따라 위 문제의 답은 ④번이라고 할 수밖에 없겠다.

새 정부 출범 후 혹시나 기대한 것 중 하나가 친노동계 정권이 들어섰으니 노동계도 다소나마 합리적으로 변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실제로 외국 사례를 보면 진보 정권은 노동계와 스킨십이 강해 노동 개혁에 성공하는 사례가 많다고 한다. 2002년 시작해 독일을 '유럽의 병자'에서 깨어나게 했다는 하르츠개혁도 좌파인 사민당 슈뢰더 총리 시절 이룬 것이다. 2015년 강력한 노동 개혁 법안(the Jobs Act)을 통과시킨 이탈리아 렌치 총리도 중도좌파 민주당 소속이었다.

새 정부도 노동계와 스킨십을 할 수 있는 여건으로 치면 역대 최강일 것이다. 현재 청와대와 여당에도 양대 노총 출신이 다수 포진해 있다. 노동계와 제대로 소통할 수 있는 호기를 맞은 셈이다. 새 정부도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들려면 공공부문 일자리 늘리고 기업들 다그치는 것으로 부족하고 정규직 노조 양보를 얻어낼 필요가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노동 전문가들은 지금 노동계 현실에서 노동 유연성까지 양보는 어렵다 치더라도, 정규직들이 당분간 임금 인상 요구를 자제하는 정도의 협조는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현재까지 현실은 기대와 정반대로 가고 있다. 정규직 노조들은 ①번, ③번 사례와 같이 생색내기 시늉만 내면서 "촛불 빚을 갚으라"며 30일 총파업을 예고하고 있다. 정부도 노동계를 설득할 호기를 살릴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으니 우리나라 노동시장이 어디로 갈지 걱정스럽기만 하다.

[김민철 사회정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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