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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7 (월)

[정민의 世說新語] [422] 가경가비(可敬可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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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이세재(李世載·1648~1706)는 실무 역량이 탁월했다. 부산 왜관에는 툭하면 차왜(差倭)가 드나들며 불법 교역을 일삼고, 풍속을 해치는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가 동래부사로 부임하면서 규정을 점검하고 과감한 조처를 취하자 왜인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그의 위엄에 압도되어 간사한 버릇을 고쳤다. 그는 동래부가 생긴 이래 최고 명관이란 찬사를 들었다.

1698년 경상관찰사가 되어서는 칠곡의 가산산성(架山山城)을 새로 쌓고, 병기(兵器)를 정비해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뒤에 그가 평안감사로 부임했다. 그곳의 자모산성(慈母山城)은 옛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지키던 성 가운데 하나였다. 임꺽정이 이곳을 본거지로 삼아 활동했을 만큼 수량도 풍부하고 입지도 훌륭했다.

산성의 전략적 중요성을 한눈에 파악한 이세재가 무너진 성첩을 보수하려 했으나 쌓을 벽돌이 없었다. 산성 위에 해묵은 구덩이 수십 개가 있었다. 파보니 벽돌 굽는 가마가 나왔다. 그리고 구덩이마다 이미 구워진 벽돌이 가득 들어 있었다. 벽돌마다 박서(朴犀)란 두 글자가 또렷했다.

박서가 누군가? 1231년 귀주(龜州) 전투에서 그 포악한 몽골군을 물리쳤던 고려의 명장이 아닌가? 그는 1만명이 넘는 몽골군의 발을 귀주성에 넉 달이나 묶어 두어 그들의 계획에 큰 차질을 빚게 한 인물이다. 그가 이곳 자모산성에 성을 쌓으려고 벽돌을 만들었다가 미처 완성하지 못했던 것이다. 수백 년 뒤 이세재가 그 벽돌을 꺼내 산성을 쌓는 데 요긴하게 썼다. 이세재는 자산부사(慈山府使) 정석빈(鄭碩賓)과 함께 둔전을 경영해 경비를 마련하기도 했다.

이덕리(李德履·1725~1797)가 자신의 국방 제안을 담은 실학서 '상두지(桑土志)'에 이 일을 기록했다. 끝에 그가 한마디를 보탰다. '옛사람의 정신과 기력은 수백년 뒤에도 그 뜻과 사업을 능히 펼 수 있게 하니, 공경할 만하고 또한 슬퍼할 만하다(古人精神氣力, 能於數百年後, 伸其志業, 可敬亦可悲也).' 때와 못 만난 그의 불우가 슬프지만 박서의 선견지명은 수백년 뒤 이세재를 만나 빛을 발했다.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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