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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6 (수)

[일사일언] 자기 복제의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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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황희연·영화평론가


정말 위험한 것은 익숙함이다. 글 쓰는 사람에게 위험한 순간은 백지가 두려울 때가 아니라 어떤 원고든 쓱쓱 써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붙었을 때다. 글 쓰는 게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나는 덜컥 겁이 났다. 사는 게 흥미진진한 모험 소설 같았는데 갑자기 지루한 드라마를 찍고 있는 것 같은 심드렁한 마음이 들었다. 그건 내가 제일 잘하는 일을, 아주 익숙한 방식으로 척척 해내고 있을 때 벌어진 감정의 이상 기후였다. 지금 내가 위험한 자기 복제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비슷한 원고만 찍어내듯 생산하고 있는 건 아닐까. 마음이 조금 불편해졌다. 기자 생활을 정리하고 프리랜서라는 전장에 뛰어들기로 결심한 것은 그런 익숙한 편안함 대신 위험한 모험을 즐기고 싶다는 다소 치기 어린 이유 때문이었다. 더 이상 자기 복제로 먹고사는 짓은 그만두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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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이라'의 톰 크루즈를 보면서 문득 '자기 복제'라는 네 글자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는 40여 년간 전 세계 박스오피스 1위 자리를 놓치지 않은 최고의 스타다. '브랫팩'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묶여 할리우드를 강타한 80년대 청춘 스타들이 소리 소문 없이 명멸해간 순간에도 그는 늘 최고의 자리를 지키며 도심의 마천루와 위험한 낭떠러지, 저주가 풀리지 않은 사막 위를 마음껏 휘젓고 다녔다. 한 번도 퇴로를 걷지 않은 남자의 눈빛은 당당함으로 가득 차 있다. 멋지고 세련됐다는 걸 부인하긴 어렵다. 그런데 이상하게 나에겐 이 남자의 안정된 자신감이 조금 부담스럽다. 항상 제일 잘하는 일만, 익숙한 방식으로 해내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천의 얼굴까진 아니라도 우리는 배우를 통해 매번 다른 얼굴을 만나고 싶다. 그걸 만족시키는 배우를 만나면 신이 난다. 평소 근엄한 표정의 크리스토퍼 워큰이 '웨폰 오브 초이스' 뮤직 비디오에서 신나게 춤을 추던 모습은 얼마나 짜릿하고 신선했던가. 매 순간 자기 복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게 바로 그런 모험심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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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boy Slim 뮤직비디오'Weapon Of Choice'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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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연·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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