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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도시를 읽다](5) 전남 목포 - 항구에 맺은 절개, 목포의 사랑…이젠 눈물 흘리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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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지도의 왼쪽 끝, 사무치는 한과 애타는 슬픔을 오롯이 안았던 도시가 있다. 전남 목포(木浦)다. 일제강점기 서럽고 애달프게 부르던 노래 ‘목포의 눈물’ 때문일까. 목포 하면 왠지 명치끝이 시려온다. 시인 문병란은 목포를 “더 이상 갈 데가 없는 사람들이 와서 동백꽃처럼 타오르다 슬프게 시들어버리는 곳”이라고 했다. 하지만 목포는 더 이상 종착역이 아니다. 1897년 개항 이후 조선인들이 만든 근대 도시, ‘목포의 심장’인 목원동이 걷고, 말하고, 나누고 싶은 길로 새 단장 중이다. 100년의 시간을 얽히고설킨 실핏줄처럼 담고 있는 목원동을 천천히 걸었다. 유달산을 품에 안은 목포가 설움의 항구가 아닌 낭만의 항구로 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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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KTX를 타고 2시간30분 만에 목포에 도착했다. 역 앞에서 며칠 전 만들었다는 목원동 안내지도를 폈다. 유달산으로 오르는 ‘목포 물장수 옥단이 길’은 총 4.6㎞로 3~4시간 정도 걸린다고 적혀 있었다. 먼저 ‘무소유의 거리’로 향했다. 책 <무소유>로 유명한 법정 스님(1932~2010)과 고은 시인(83)이 만났다는 정광 정혜원은 이름부터 생소했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일본식 사찰인데 한국전쟁 후 승려였던 고은이 포교활동을 하면서 전남대 학생이던 박재철(법정)의 불교 귀의를 도왔던 운명적인 장소다.

야트막한 골목을 오르다 만난 사찰은 자칫 스쳐지날 만큼 아담했다. 얼마 전 담을 허물었단다. 경사진 검은 일본식 지붕이 파란 하늘에 걸려 더 도드라져 보인다. 한옥 앞마당 같은 한적한 경내로 들어서자 목탁소리가 은은하게 울려퍼졌다. 여닫이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마룻바닥이 삐걱거려 발끝을 세웠다. 스님의 불경 읽는 소리가 자그마한 실내정원을 따라 흘렀다. 경건함이 오래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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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의 끝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왜군들을 스스로 물러나게 했다는 노적봉을 마주 볼 수 있다. 노적봉의 높이는 해발 60m다. 산이 아니라 정말 벼 가마를 쌓아놨다고 볼 수 있었을지 모른다. 이순신은 노적봉을 곡식더미처럼 위장하고 영산강 상류에 백토를 풀어 쌀뜨물처럼 보이게 해 왜군의 기를 꺾었다.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에선 가수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 흘렀다. 애달팠다. 노적봉을 끼고 돌아나오는 골목은 가팔랐다. 한 집 건너 한 집 늘어서 있는 미용실과 세탁소 간판이 나왔다.

“여기가 ‘마인계터’입니다. 1910년대 만인들에게 계표를 팔아 추첨으로 배당금을 나눠주던 일종의 복권이지요. 편하게 발음하다보니 이름이 만인에서 마인으로 변형됐습니다.” 목포시 문화해설사 조대형씨(60)의 설명이다. 도로표지판을 올려다보니 ‘Main’이라고 적혀 있다. 독일어로 읽으면 ‘마인’이요 영어로는 ‘메인’, 즉 중심도로였다. 궁금한 것은 삐뚤빼뚤한 골목을 다 합쳐도 4거리인데 목포시민들은 이곳을 죽동 6거리라고 부른다. 조씨의 답이 재밌다. “짐승이 다니는 골목도 길이니까요.” 90년째 영업 중인 이발소는 아쉽게도 문이 닫혀 있었다. 휴대폰으로 연락하면 된다고 한다.

1920~1930년대 목포는 일본에 모든 것을 빼앗겼다. 근대식 석조건물이 우뚝한 개항장 인근에는 일본인들이 살았다. 삶의 터전을 잃은 조선인들은 유달산 자락 공동묘지 인근에 판자촌을 지었다. 비가 내리면 하수도가 없어 똥물이 허리까지 찼다. 저 멀리 유달산 자락의 순환도로가 보였다. 1970년대 말 순환도로를 경계로 산 위쪽에 판자촌 588세대가 있었는데 한꺼번에 없앴다고 했다. 뿔뿔이 흩어진 가난한 서민을 위로하는 망향탑은 처절했다. 양동이에 물을 가득 담아 미로 같은 좁은 골목으로 다니던 ‘소녀 물장수 옥단이’가 그 길을 다녔을 것이다.

1925년 목포시민 성금으로 지어진 목포청년회관은 아담했다. 저항운동의 시발점이자 산실이었던 50평 남짓한 석조건물은 소극장으로 쓰이고 있다. 커튼을 열어보니 실내 농구장만 한 크기에 의자만 30여개가 놓여 있다. 일제강점기 감시가 심했을 당시 독립의 꿈을 나누었을 사랑방은 뜨거웠다. 이곳에서 5분 정도 떨어져 있는 요양병원은 옛 감리터였다. 감리는 목포 개항 후 최초의 행정관서로 지방 외교부나 마찬가지.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은 20세기 건축양식을 띤 부속건물뿐이었다. 김성규 서장은 1926년 임금을 둘러싼 부두 노동자 사건이 터졌을 때 일본인에게 감금당하면서도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목포 하면 예향의 도시지요. 승무와 살풀이춤의 대가 이매방(1927~2015), <전원일기> 극작가 차범석(1924~2006)의 고향이 목포입니다.”

목포시청 관광마케팅팀 장일례 박사(47)가 ‘무지개 구름다리’로 안내했다. 두 사람의 일대기를 그리는 작업이 진행 중이었는데 비 갠 뒤 맑은 하늘을 수놓는 일곱 빛깔 무지개처럼 목포에 희망이 넘쳐나기를 바라는 듯했다. 벽화거리 골목은 예쁘장하게 색을 입고 있었다. 딱지, 사방치기 등 옛스러운 정서에 익살스러운 만화들이 환하게 손짓했다.

극작가 김우진(1897~1926)의 생가터인 북교동 성당은 소박했다.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 김우진은 가수 윤심덕과의 비극적인 사랑의 주인공이다. ‘사의 찬미’로 유명한 윤심덕은 결국 유부남인 김우진과의 사랑이 이뤄지지 못하자 그와 함께 현해탄에 몸을 던졌다. 길 아래 양동교회 옆에는 이난영의 생가터가 있다. 목포 양동에서 태어나 제주도로 더부살이를 떠나는 어머니와 북교초 4학년을 중퇴할 때까지 살았던 곳이다. 채 2~3평이 안되는 좁은 공간이었다. ‘목포의 눈물’과 ‘목포는 항구다’라고 애달파하는 가녀린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다순구미’ 마을을 2년 만에 다시 찾았다. 다순구미는 ‘따뜻한 볕이 드는 후미지고 구석진 동네’라는 뜻을 가진 온금동을 말한다. 목포의 첫 관문이던 온금동은 1912년 생겨난 가난한 어부들의 달동네였다. 물고기가 잡히지 않는 ‘조금(小潮·작은 밀물)’에 생긴 아이들이 뛰놀아 ‘조금새끼’ 마을로 불리기도 했다. 아이들의 생일이 똑같고 아버지의 제삿날이 같다는 얘기는 가슴 저몄다. 빈집은 여럿이었다. 상추가 심어져 있는 어깨높이 담벼락을 올려다보는데 개들이 요란하게 짖었다. 얼마 전 상수도가 들어왔단다. 그나마 기쁜 소식이다.

“다순구미에 볕이 들고 있습니다. 텅 비었던 조선내화주식회사 공장에는 ‘째보창’ 극장이 생겼어요. 멋스러운 커피전문점도 들어섰습니다.”

목포시청 관광과 조건형 과장(61)은 “목포는 영산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물목, 생명력 넘치는 항구도시”라면서 “강의 끝자락이 아닌 먼바다가 시작되는 도시”라고 말했다. 목포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세발낙지에 홍어·민어까지…목포에 가면 먹보가 된다

맛고을 전라도에서도 목포 음식은 한가락 한다. 입안에 감기는 세발낙지, 잔칫상에서 빠지지 않는 홍어, 쌀 한 섬과도 안 바꾼다는 민어, 살이 통통하게 오른 꽃게와 갈치…. 목포에 가면 먹보가 된다.

‘장터식당’(061-244-8880)은 꽃게비빔밥으로 유명하다. 어머니의 손맛을 아들이 잇고 있다. 꽃게살을 잘 발라내 시뻘건 양념과 무쳐내는데 겉보기엔 매울 것 같지만 순하고 자극적이지 않다. 꽃게살무침으로 전남 지정 별미집 1호로 선정됐다. 꽃게무침 2인분 2만4000원, 꽃게탕 3만원.

‘수담일식회’(061-247-4700)는 목포 바다를 바라보며 보리굴비 정식을 제대로 맛볼 수 있는 집. 전복죽으로 입맛을 돋우면 싱싱한 모둠회와 해삼류 등이 밑반찬으로 나온다. 굴비정식 1인 2만5000원.

‘목원횟집’(061-244-2022)에 가면 제철 회를 맛볼 수 있다. 병어회는 달콤하면서도 입안에서 부드럽게 살살 녹는다. 산낙지육회 탕탕이는 구수하면서도 씹는 맛이 일품. 계절회 4인 한상 10만원.

‘신안뻘낙지’(061-243-8181)는 싱싱한 뻘낙지로 유명하다. 20년 넘게 낙지 요리만 선보이고 있다. 연포탕은 국물이 깔끔하면서도 시원하다. 비빔밥은 낙지가 많아 흡족하다. 낙지비빔밥 1만1000원.

‘인동주마을’(061-284-4068)은 홍어와 꽃게장 정식집. 수육에 알과 내장이 꽉 들어찬 게장과 알싸한 홍어를 함께 즐길 수 있다. 홍어는 오래 삭히지 않아 처음 먹는 사람도 도전할 만하다. 빛깔이 고운 인동초 막걸리도 유명하다. 인동초는 겨울에도 말라죽지 않는 질긴 생명력을 갖고 있어 건강에 좋다. 간이 잘 배인 간장새우도 별미다. 간장꽃게장 정식 2인 3만5000원.

‘초원음식점’(061-243-22340)은 갈치 중매인들도 믿고 찾는 곳으로 소문나 있다. 먹갈치를 쓴다. 꽃게무침덮밥은 고소하고 칼칼하다. 갈치찜 1인분 1만5000원.

‘명인집’(061-245-8808)은 한정식과 목포의 5가지 맛(갈치, 낙지, 꽃게, 민어, 홍어)을 온전히 즐길 수 있다. 밑반찬만으로도 밥 한 그릇을 뚝딱 해결할 수 있을 정도. 한상차림 3~4인 기준 10만원.

‘해빔’(061-282-2770)은 꽃게살비빔밥과 된장을 기본으로 한 멍게비빔밥이 인기다. 해안 청정지역인 신안 앞바다에서 채취한 해초를 주재료로 쓴다. 해산물 비린내를 없애주면서 재료 본연의 맛과 풍미를 살리는 특별소스 맛이 일품. 꽃게살비빔밥 1만2000원, 멍게비빔밥 1만원.

‘선경준치횟집’(061-242-5653)은 준치를 야채와 매콤하게 무쳐내는 무침이 유명하다. 준치회무침 8000원.

‘영란횟집’(061-243-7311)은 30년 전통의 민어요리 전문점. 지느러미, 부레까지 버릴 게 하나 없는 민어는 목포에 ‘민어거리’가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초장에 찍은 민어를 묵은지에 싸먹는다. 환상적이다. 민어 코스요리 4인 기준 15만원.

‘독천식당’(061-242-6528)은 여러 종류의 낙지 음식을 내놓는다. 남도 음식축제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낙지탕탕이 1인분에 1만5000원.

‘금메달식당’(061-272-2697)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30년 이상 된 홍어집이다. 살짝 얼린 홍어애는 시원하면서도 촉촉하다. 예약은 필수. 홍어삼합 정식 1인 5만원. 홍어탕 1인 2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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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 정유미 기자 youm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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