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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오랑캐로 불린 中 소수민족의 역사를 파헤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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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민족사학자가 펴낸 ‘절반의 중국사’

오늘날 내몽골 지역은 대륙성 온대기후에 속해 건조하고 바람이 많은 곳이다. 기원전 3세기 이곳에 살았던 유목민족이 식량을 얻는 방법은 농사를 짓고 사는 초원민족을 습격하는 것이었다. 유목민족이 초원민족을 습격하는 횟수가 늘면서 점차 전쟁의 양상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초원민족이 유목민족의 기마부대를 상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 때문에 초원민족은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유목민족을 비하하고 멸시했다. 훗날 초원민족은 중원에서 문자를 발명하고 역사편찬의 권리를 갖게 되면서 유목민족에게 모욕적인 이름을 붙였다. 전국시대에는 사람들의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흉노’(匈奴)라 불렀고, 진한시기에는 더욱 강한 멸시의 의미를 담아 ‘호’(胡)라 불렀다.

중국의 민족사학 연구자인 가오훙레이(高洪雷)는 ‘절반의 중국사’를 통해 흉노를 비롯한 중국의 소수민족을 소개한다. 저자는 한족이 중심이 되는 중국 역사를 ‘반쪽’으로 규정하고, 나머지 소수민족의 역사를 더해 진정한 ‘하나’라고 말한다. 책은 중국 공산당원의 교육연수교재로 쓰일 만큼 중국 내에서 널리 알려진 교양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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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를 세운 진시황은 “진(秦)을 망하게 할 자는 호(胡·흉노)이다”라는 예언을 듣고 79만명의 군대와 백성을 동원해 만리장성을 쌓게 했다. 사진은 만리장성의 9대 관문 중 하나인 안문관.메디치 제공


오늘날의 중국은 ‘하나의 중국’을 고수하고 있다. 이 같은 원칙의 배경에는 중국 내 소수민족이 있다. 다민족국가인 중국은 한족이 절대 다수인 91.5%를 차지하지만 인구의 8.5%에 불과한 55개 소수민족이 전체 영토의 64%를 차지하고 있다. 한족 역시 흉노와 동궐, 거란, 몽골 등 수많은 이민족이 중원을 지배하면서 하나로 흡수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의 소수민족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많지 않다. 흔히 역사를 승자의 기록이라 보듯 중국의 역사가 한족을 중심으로 기술된 탓이다. 그나마 원나라를 건국한 몽골과 청나라를 세운 여진 정도가 역사에서 조명받고 있다.

이에 저자는 “역사학자 대부분은 중원 왕조의 흥망성쇠만 기록하고 여러 소수민족에 대해서는 가끔 언급해 왔다”면서 “현재 중국에 살고 있는 50여개 소수민족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에 대한 답을 찾고자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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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원제 때의 궁녀인 왕소군은 혼인을 통한 화친을 위해 흉노로 시집을 갔다. 사진은 내몽골 왕소군의 무덤에 서 있는 왕소군의 동상.메디치 제공


중국의 역사에서 흉노는 공포의 대상이자 악몽 같은 존재였다. 진시황 26년, 6국이 통일하기 위해 전쟁을 치르던 시기 흉노는 조나라를 기습해 점령했다. 진시황은 진으로 통일을 이룬 직후 가장 먼저 흉노를 제압했다. 당시 진은 전쟁으로 국토가 황폐화되고 인구가 크게 줄어든 상황이었지만 흉노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축조했다. 79만명의 군대와 백성이 동원된 만리장성은 훗날 중국의 시대정신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 시기의 흉노는 서역으로 시선을 돌려 26개 왕국을 복속시켰다. 한 고조 6년에는 한신을 투항시키고 만리장성을 넘어 진양을 점령했다. 이듬해 유방은 보병 32만명을 이끌고 흉노와의 전쟁을 선포했지만, 흉노의 왕 묵돌은 40만 기병으로 이들을 포위했다. 유방은 황실의 여인을 흉노로 보내 외교적 관계를 형성했는데 훗날 ‘화친(和親)정책’의 시초였다.

저자는 오늘날 인도까지 영토를 넓혔던 백흉노와 북방을 통일한 저, 중원의 왕조를 위협했던 토번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이어 세계의 제국을 만든 몽골이 등장한다. 초원의 주인이 된 테무친은 몽골을 9만5000호로 나누어 귀족과 공신들에게 나눠 줬다. 직접 통제한 1만명의 친위대는 신임하던 4명의 장군에게 줬다. 몽골은 빠른 속도로 세계제국을 만들었고, 이들의 기병 앞에 중국의 중원과 유럽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저자는 중국 소수민족의 역사를 한 권의 책으로 집약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으면서도 중화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인상을 준다. 중국은 역사에 있어서 지리적 영역 안의 모든 왕조를 중국사에 포함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저자 역시 이러한 궤를 따르는 모양새다.

이에 책을 옮긴 김선자 연세대 중국연구원 전문연구원은 저자의 역사적 인식의 오류를 바로잡는다. 그는 150쪽에 걸쳐 티베트와 위구르 등 일부 지역의 역사서술에서는 오류가 확인됐다고 지적했다.

권구성 기자 ks@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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