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여년 제주음식 연구, ‘제주향토음식명인 1호’ 김지순씨
저장 음식보다 신선함을 즐겨
가난·양념 부족 아닌 ‘현명함’
24일 제주향토음식명인 1호 김지순씨가 그의 사무실에서 제주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제주 음식 이야기를 하고 있다. |
“음식에 날된장을 쓰는 것은 전국에서 제주뿐이에요. 여름에는 날된장을 물에 개어 톳을 넣고 냉국으로 먹죠. 끓이지 않습니다. 여기에 식초를 더하면 물회가 되지요. 제주된장은 군내가 나지 않아 발효된 날된장을 그대로 먹을 수 있는 것이에요.”
김지순씨(81)는 제주도 향토음식명인 1호다. 솜씨 좋은 할머니와 어머니 밑에서 자란 덕분에 어릴 적부터 음식에 관심이 많았다. 이화여대 화학과로 진학했지만 1년 만에 수도여자사범대학 가정과로 옮겼다. 제주향토음식을 연구한 지 50여년, 제주 음식 변천사의 산증인이나 다름없는 김씨를 지난 24일 만났다.
제주에서는 주로 된장과 간장을 양념으로 쓴다. 제주전통음식 조리법에서 고추장, 고춧가루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김씨는 “제주에서는 고추 농사가 잘되지 않았다. 토지와 날씨의 특성상 고추의 당도가 높아 벌레가 많이 생겼다. 농약을 쓰지 않던 예전에는 수확량이 적었던 것이다. 제주는 습기가 많아 빻아서 보관하는 것도 어려웠다”고 말했다. 자연스레 된장, 간장 위주의 음식문화가 발달했다. 날된장만으로 맛을 낸 냉국, 물회 등이 그것이다. 수박과 참외, 표고버섯도 된장에 찍어 먹었다. 쌈장만 해도 다른 지역에서는 된장의 군내를 제거하기 위해 끓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제주에서는 날된장에 식초, 깨, 마늘 등을 섞으면 끝이다. 김씨는 “제주 된장에 군내가 없는 이유는 유약을 바르지 않아 통기성 좋은 제주옹기에 보관하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고춧가루와 같은 양념을 쓰지 않다 보니 제주 음식은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는 담백한 음식이 됐다. 투박하다 했던 제주 음식은 결국 지금의 웰빙 음식과 다를 바 없다. 물론 제주의 바다와 땅에서 나는 신선한 재료도 한몫했다. 옥돔국과 같은 생선국, 고등어죽 등은 바다에서 갓 잡은 생선이 있었기에 가능한 요리다.
김씨는 쌈 채소 역시 제주의 건강한 음식 문화로 꼽았다. 김씨는 “여름에는 콩잎에 멸치젓을, 겨울에는 배춧잎에 자리젓을 함께 먹었다. 양하잎, 칡잎 등 철마다 쌈 채소는 끊이지 않았다. 이 역시 최근 선호하는 건강식과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이는 제주 집집마다 부엌 옆에 있던 우영밭(텃밭) 때문에 가능했다.
김씨는 “우영밭에 채소를 심어 매일 필요한 부식을 충당했다. 온난한 날씨 덕분에 사계절 제철 채소가 자랐고 저장음식이 굳이 발달할 필요가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자신의 일을 잇는 아들 양용진씨와 함께 ‘제주향토음식보전연구원’을 만들어 향토음식에 대한 조사를 계속하고 있다. 제주 내에서도 지역에 따라 조리법, 음식문화가 다르다. 김씨는 “제주 동부지역은 토양이 척박하다보니 메밀 등을 심어 메밀음식이 발달했고 서부지역은 콩을 많이 심어 두부 음식이 많다. 자리젓만 하더라도 모슬포 지역의 자리는 크고 억세다 보니 두들기고 짓이겨 만들고, 동부지역인 성산포에서는 자리 통째로 젓을 만든다”고 했다.
제주의 향토음식 하나하나에 제주의 역사와 문화가 녹아있고 과학이 담겨있다. 제주의 결혼잔치 또는 상가에서 맛볼 수 있는 두부는 단단하고 메마르다. 김씨는 “제주에서는 3일에서 5일에 걸쳐 잔치 또는 상을 치르다보니 음식을 상하지 않게 보관하는 게 중요했다. 이 때문에 두부의 물기를 짜 일반두부를 3배로 농축한 마른두부로 만들어 손님에게 대접했는데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순대 역시 채소를 넣지 않아 쉬지 않도록 했다. 순대를 초간장에 찍어 먹었는데 이는 식중독 예방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제주 음식의 조리법을 놓고 제주가 가난해서, 양념이 없어서라고 단순하게 치부했지만 알고 보면 제주인이 얼마나 지혜롭고 현명했는지 알 수 있다”고 했다.
<글·사진 박미라 기자 mr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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