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종군위안부’ 작가 한국계 미국인, 노라 옥자 켈러
“한국 오면 미국인이지만, 미국선 한국인…‘경계’는 무의미
위안부·양공주 이야기, 끔찍하지만 누군가는 알려야 할 일”
‘2017 서울국제문학포럼’ 참석을 위해 한국을 방문한 한국계 미국인 작가 노라 옥자 켈러는 지난 24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작가로서 역사 속 여성들의 이야기에 대해 앞으로도 꾸준히 관심을 기울이겠다”고 말하고 있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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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삶을 조명한 소설 <종군위안부(Comfort Woman)>를 쓴 한국계 미국 작가 노라 옥자 켈러(Nora Okja Keller·52)는 책머리에 “희생된 모든 종군위안부를 위하여…”라는 헌사를 실었다. 그는 위안부 피해자인 고 황금주 할머니의 증언을 바탕으로 쓴 이 작품에서 압록강 북부 위안소로 끌려간 열두 살 소녀 ‘순효’의 삶을 생생하게 전달했다. ‘아키코 41’로 불렸던 순효는 말한다. “열두 살 되던 해 나는 살해당했다.”
<종군위안부>는 미국에서 1997년 ‘최고의 도서’로 꼽히며 이듬해 ‘아메리칸 북어워즈’를 수상했다. 그는 두 번째 작품 <여우소녀>(2001)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미군기지촌의 혼혈인 두 여성의 삶을 다뤘다. 일본군 위안부, ‘양공주’ 등 한국 역사에서 성적 착취를 겪어야 했던 여성들의 굴곡진 삶을 작품에 담아온 켈러가 ‘2017 서울국제문학포럼’ 참석을 위해 한국을 찾았다. ‘새로운 환경 속의 문학과 독자’라는 주제로 지난 23일 시작된 서울국제문학포럼은 25일 막을 내렸다. 포럼 폐막 하루 전인 24일 오후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대산문화재단 회의실에서 켈러를 만났다. 2005년 6월 세계여성학대회의 초청 연설자로 한국을 찾았던 그는 이번이 세 번째 한국 방문이다. 당시 서울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수요시위에서 황금주 할머니를 만나기도 했던 그는 황 할머니가 2013년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황 할머니가 돌아가신 줄은 몰랐네요. 정말 유감입니다. 1993년 하와이대학에서 개최한 인권심포지엄에서 황 할머니가 겪은 얘기를 처음 듣고 몸이 아플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시절을 겪은 것도 대단한데, 그러한 일들을 세상에 알린다는 사실이 존경스러웠어요.”
황 할머니의 얘기를 듣고 위안부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단편소설 ‘모국어(Mother Tongue)’를 발표했고, 이를 확장하여 <종군위안부>를 내놓았다. 그는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기억을 다시 불러내는 게 고통스럽고 끔찍하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까진 못했는데 위안부들의 얘기가 계속 저를 망령처럼 따라다녔습니다, 그래서 위안부에 대한 자료들을 찾아봤는데 영어로 된 자료는 거의 없다시피 하더라고요. 이 중요한 얘기를 말하는 사람이 왜 아무도 없는지 궁금했습니다.”
켈러는 한국인 어머니와 독일계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세 살 때 하와이로 왔다. 하와이대학에서 영어와 심리학을 전공했으며 산타크루즈에 있는 캘리포니아대학에서 미국 문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푸나호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켈러의 미들 네임인 ‘옥자’는 그의 어머니가 지었다. ‘옥자’의 한국어 뜻을 알고 있다는 그는 “어린 시절 한국계 미국인임을 잊고 완벽한 ‘아메리칸 걸’로 살려 했었다”고 말했다.
“<종군위안부>를 쓴 것은 어머니에게 속죄하는 과정이기도 해요. 어렸을 때는 영어 못하는 엄마를 외면하곤 했죠. 엄마가 학교에 오거나, 세금 문제 등으로 말다툼이 있을 때도 전혀 안 도와주고 오히려 영어를 잘 못하는 엄마를 흉보고 모른 척했어요.”
하지만 켈러는 두 딸에게 한국식 이름 ‘태’와 ‘선희’를 각각 지어줬다. 큰딸의 이름은 어머니의 이름 ‘태임’에서 첫자를 따왔다, 그는 “엄마는 아이의 정체성 확립을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면서 “딸들이 미국에서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한국 이름을 지어줬다”고 말했다.
“어렸을 때 제가 엄마랑 거리감이 느껴진 큰 이유는 언어장벽이었어요. 엄마는 미국에 오자마자 한국말을 전혀 안 쓰려고 해서 저는 한국말을 배울 기회가 없었죠. 저야 한국어를 못하지만 어머니에게 제 딸들에게 ‘한국말을 좀 가르쳐 주라’고 하는데, 그러면 엄마가 ‘한국말 너무 어렵다’며 웃어넘기세요.”
지난 23일 개최된 포럼 ‘우리와 타자’ 섹션에서 ‘혼혈’을 주제로 발표를 한 켈러는 “한국에 오면 나는 미국인이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살던 오하이오에서는 한국인이었다”면서 “다문화국가로 접어든 한국 사회도 다름과 차이에 대하여, 경계에 대한 인식 자체를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다르다는 용어 자체가 잠재적으로 문제가 많은 표현 아닌가요? 우리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해주는 게 중요합니다. 다름을 인정하면서 같은 테두리 안에 함께 살아가야죠.”
26일 미국으로 돌아가는 그는 “한국에 올 때마다 목욕탕을 찾는다”며 한국의 때밀이 문화에 엄지를 치켜세우기도 했다. 그는 “이번 포럼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면서 “앞으로 1980년대 하와이의 한국인 커뮤니티에 대해서 글을 쓸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명희 기자 mins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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