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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0 (수)

반핵평화 앞장 ‘피폭 2세’ 김형률 12주기 추모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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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7일 오전 11시 부산민주공원서 추모식

34살 꽃다운 나이에 숨진 고인 기려



한겨레

고 김형률씨 생전 모습.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인 1945년 8월6일 아침 8시께 일본 히로시마의 하늘에 인류 최초의 핵무기인 ‘리틀 보이’를 실은 미 공군 B29 폭격기가 나타났다. 잠시 뒤 폭발음과 함께 공중에 버섯구름이 올라왔다. 25만여명의 히로시마 시민 가운데 7만여명이 죽었다.

당시 6살이던 이곡지(78)씨는 겨우 살아났지만 다리는 새카맣게 탔고 악성 종양과 피부병에 시달렸다. 이씨의 언니는 그 자리에서 숨졌다. 해방 뒤 이씨는 한국에서 김봉대(80)씨와 결혼해 자식을 낳았다.

이씨의 피폭 후유증은 대물림을 했다. 1970년 부산 동구에서 태어난 아들 형률씨는 폐질환과 빈혈 등 질병에 자주 시달렸다. 형률씨는 2002년 폐렴 때문에 또 다시 입원한 병원에서 우연히 자신의 진료기록을 보고 ‘선천성 면역글로블린 결핍증’에 걸린 사실을 알았다. 이 병은 백혈구 이상으로 면역체계가 약해지는 희귀 난치병이다.

형률씨는 2002년 3월22일 한국청년연합회 대구지부 사무실에서 아버지와 함께 기자회견을 열어 피폭 후유증을 앓는 원폭 피해자 2세라고 밝혔다. 원폭 피해자 2세도 피폭 후유증을 대물림해 앓고 있다는 것을 우리 사회에 처음 알린 것이다. 이어 그는 원폭 피해자 2세들의 단체인 ‘한국원폭2세환우회’를 만들었다. 8개 시민단체와 함께 ‘원폭 2세 환우 문제 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정부 차원의 실태조사, 진상규명을 내용으로 하는 진정서를 국가인권위원회에 냈다. 그는 병원을 오가면서도 원폭 피해자와 2세의 치료 등을 국가가 책임지는 특별법 제정에 앞장서다가 2005년 5월29일 부산 동구 수정동 아파트에서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서른다섯살 생일을 이틀 앞두고였다. 그의 유해는 납골함에 담겨 부산영락공원에 안치됐다가 지난 4월 아버지의 고향인 경남 합천군 선영으로 옮겨졌다.

그가 생전에 그토록 원했던 ‘한국인 원자폭탄 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법’은 2016년 5월19일에 제정됐다. 그가 숨지고 11년 뒤였다. 특별법은 한국인 원폭 피해자 실태조사, 의료 지원, 피해자 추모 기념사업 등의 내용을 담고 있지만 원폭 피해자 후손을 지원하는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

김형률 추모사업회는 27일 오전 11시 부산 중구 중앙동 부산 민주공원 민주항쟁기념관 1층 소극장에서 ‘한국원폭2세피해자 김형률 12주기 추모제’를 연다. 김종세 부산민주공원 관장이 인사를 하고 김씨의 약력 소개와 추모영상이 끝나면 김씨 유족이 추모의 글을 읽고 김씨의 아버지 김봉대씨가 인사를 하고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에 김씨의 반전 평화활동을 기록한 자료 등 사료를 기증한다. 이어 2008년 김씨의 삶을 책으로 펴낸 전진성 부산교육대 교수가 사료 기증의 의미를 설명한다. 참가자들은 헌화와 분향을 한 뒤 김씨의 납골함이 있는 합천군 묘역으로 이동해 참배한다.

부산/김광수 기자 k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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