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지원의 오페라와 도시] 토리노와 '마농 레스코'
우에노 공원 인근의 도쿄문화회관에서 열린 공연은 연일 만석이었고, 주요 일간지와 관련 잡지들도 토리노에 관한 이야기로 열을 올렸다. 이에 편승한 것일까. 롯폰기의 한 이탈리아 레스토랑이 '토리노 특선 메뉴'를 선보였다. 흰 송로버섯 타르투포 비안코가 듬뿍 들어간 생면 파스타 타야린(Tajarin)과 이탈리아 최고의 명품 와인 바롤로(Barolo)를 함께 내고, 후식으로는 헤이즐넛을 잔뜩 넣은 잔두이오토(Gianduiotto) 초콜릿이 제공되는 값비싼 코스 요리였다. '왕실(王室)의 만찬'이란 거창한 부제까지 붙어 있었다.
한때 로마의 식민 도시로 번영을 누리다 11세기 이후 사보이 왕가의 발원지가 된 이탈리아 토리노. 포강을 끼고, 금빛 조명에 물든 오래된 건물들이 도시의 품격을 자아낸다. / 황지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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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노는 이탈리아 통일을 이룩한 사보이 왕가의 발원지다. 왕실의 후예들이라 그런지 무척이나 격조 높은 자태를 자랑하는 고풍스러운 도시로도 유명하다. 온통 대리석으로 휘감긴 구도심의 찬란한 자태는 첫눈에 여행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사람들의 말투나 행동거지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다혈질의 이탈리아 사람들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매사 느리고 여유가 있으며 윤후(潤厚)한 품격이 온몸에 배어 있다. 프랑스어의 흔적이 뚜렷이 보이는 지역 방언 또한 특유의 유려한 울림으로 듣는 이의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준다.
까칠하면서도 고고한 취향 또한 토리노 사람들만의 자부심이다. 이탈리아의 명품 커피 라바차가 이 덕분에 탄생했다. 왕궁 근처에서 식료품점을 하던 루이지 라바차(Luigi Lavazza·1859~1949)는 매번 왕실에 납품하던 커피가 퇴짜를 맞자 고심을 거듭한다. 입맛이 까다롭고 요구 사항이 복잡했던 사보이 왕가의 귀공자들은 한 가지 원두만으로 내린 커피에 도저히 만족하지 못했다. 연구를 거듭하던 루이지는 여러 가지 품종을 뒤섞어 풍윤한 질감을 지녔으면서도 신선한 산미가 살아있는 블렌딩 커피를 만들어 왕자들에게 선보인다. 이탈리아 넘버원(No 1) 커피인 '라바차'의 신화는 그렇게 탄생했다.
작곡가 자코모 푸치니도 그즈음 토리노로 건너왔다. 원래는 밀라노에서 음악 활동을 하던 그였다. 밀라노 음악원을 최우수로 졸업했고, 오페라 데뷔 작품도 밀라노 스칼라 극장을 위해 썼다. 그런데 뜻밖에도 일이 잘 안 풀렸다. 학창시절부터 천재 소리를 듣던 그였지만 오페라는 실패를 거듭했다. 어느덧 그의 나이도 서른을 훌쩍 넘겼다.
롬바르디아(밀라노)를 떠나 피에몬테(토리노)로 자리를 옮긴 푸치니는 거기서 우연히 사보이 왕가의 아메데오 공작을 추모하기 위한 엘레지 하나를 작곡하게 된다. 현악 사중주로 이뤄진 이 곡의 제목은 '크리산테미(I Crisantemi)', 즉 국화였다. 하룻밤 사이에 즉흥적으로 작곡된 곡이었지만 이 곡이 갑자기 푸치니의 창작열에 불을 붙이게 된다. 마침 그는 프랑스의 소설가 아베 프레보의 '마농 레스코(Manon Lescaut)'를 오페라로 만들고 있던 중이었다.
주인공 마농은 너무나 아름다운 여인이다. 그러나 치명적인 미모가 되레 그녀를 불행으로 이끈다. 가는 곳마다 뭇 남자들의 유혹이 끊이질 않았다. 그녀는 돈과 사랑, 허영과 행복의 경계선상에서 둘 모두를 취하려다 처절하게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푸치니는 철없는 10대 소녀 마농 역에 무겁고 성숙한 스타일의 소프라노 목소리를 붙였다. 오히려 그녀 옆을 맴돌며 안타까워하는 귀공자 데 그리외는 극도로 예민한 테너의 목소리로 되어 있다. 거의 불협화음에 가까운 두 사람의 음악은 그러나 사실 가장 안타깝고도 비극적인 앙상블로 승화한다.
아메데오 공작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썼던 비가는 오페라의 4막 내내 두 젊은 연인의 머리 위를 맴돌며 진홍빛 숙명의 비극을 예고한다. 그 처연한 슬픔과 숭고한 위엄의 음악이 모든 이를 감동시켰다. 푸치니는 토리노 왕립극장에서 발표한 '마농 레스코'로 베르디의 진정한 후계자이자 이탈리아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로 자리매김한다. 그의 나이 서른다섯 되던 해의 일이었다.
[황지원 오페라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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