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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시론] 한국당, 죽어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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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고성국 정치평론가·TV조선 객원해설위원


보수는 죽었다. 박근혜 탄핵과 조기 대선을 거치면서 대한민국의 보수는 비장함도 처절함도 없이 썩은 등걸처럼 힘없이 쓰러져 버렸다.

보수는 죽었는데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모두 강 건너 불 보듯 할 뿐이다. 그 와중에 자유한국당은 스스로 바퀴벌레당이 되고 낮술 먹는 집단이 됐다. 민망하고 창피하다. 한국당, 이들은 과연 보수의 자격이 있는가.

보수는 자신이 불완전한 존재임을 성찰적으로 고백하는 겸손함을 갖춰야 한다. 나라를 지켜왔고 오늘의 대한민국을 감당하고 있다는 자부심과 품격을 내면화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현실에서는 최선이 아니면 차선, 그것도 아니면 차악이라도 찾아내려는 치열함이 있어야 한다. '누가 세운 나란데, 어떻게 지킨 나란데'라는 격정이 마음 깊은 곳에서 불타고 있어야 한다. 어떤 소설가는 보수를 '배가 뒤집히지 않게 하는 바닥짐'이라고 했다. 그 바닥짐이 되겠다는 각오가 없는 이, 변화에 둔감한 기득권 세력, 명예도 자긍심도 없이 작은 이해관계에 매몰된 완고한 이기주의자들은 보수가 아니라 수구다. 한국당은 과연 보수인가 수구인가.

무릇 보수가 보수이려면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나라와 국민을 위한 전략과 비전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식민지로 전락할 때보다 더 긴박하게 요동치는 한반도 주변 정세 속에서 한국당은 과연 어떤 국가 방략을 갖고 있는가. 21세기 탈근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한국당은 과연 어떤 발전 전략을 갖고 있는가. 근·현대 갈등 구조가 탄핵 정국으로 응축 폭발한 상황에서 한국당은 국가 통합을 위해 과연 어떤 정치적 비전과 행동을 준비하고 있는가. 한국당이 보수인가 수구인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을 다시 던지는 이유다. 대선 참패보다 더 참담한 것은 대선 후 한국당이 보여주고 있는 지리멸렬하고도 천박한 모습이다. 대통령이 탄핵 구속되고 대선에 참패한 상황에서도 반성과 다짐이 아니라 당권을 둘러싼 이전투구만을 벌이는 한국당에 과연 보수의 미래를 맡길 수 있겠는가.

조선일보

자유한국당 정우택 대표권한대행(왼쪽부터), 김선동 원내수석부대표, 이현재 정책위의장이 16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 참석해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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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의 진보 개혁 드라이브는 당분간 국민적 지지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 4대강 감사에서 보듯 문재인 정부의 개혁은 '수구 기득권 세력의 구태와 무능 청산'이란 프레임으로 포장돼 추진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어려운 시절을 견뎌내려면 '나부터 죽겠다'는 각오가 서 있어야 한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는 성경 구절처럼 한국당은 먼저 철저히 죽어야 한다. 그 죽음 위에 새로운 보수의 꽃을 피워야 한다.

대한민국의 보수와 한국당은 무엇보다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나는 왜 정치를 하는가'라는 자기 존재에 대한 처절한 반성과 성찰로부터 정치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 국민은 보수에 정쟁이 아니라 정치를 요구하고 있다. 보수에 걸맞은 책임 정치, 품격 정치, 정도 정치, 젊고 강한 보수 정치를 열망한다. 한국당이 이 같은 국민적 요구에 부응하는 길은 스스로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다. 대선 후보와 당 지도부, 당 중진부터 백의종군함으로써 새로운 보수로 거듭나라는 국민의 요구에 응답해야 한다. 사즉생(死則生), 바로 이것이 한국당이 새로운 보수의 길을 열어갈 출발점이다.

[고성국 TV조선 객원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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