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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일본 자유미술가협회 총아는 문학수와 이중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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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길을 찾아서】 (20) 1930년대 일본화단과 전위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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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의 강사진은 어땠나요?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의 초기 회원모집 포스터에는 4명의 지도강사 명단이 적혀 있다. 아베 곤고(阿部金剛), 고가 하루에(古賀春江), 미네기시 기이치(峯岸義一), 도고 세이지(東鄕靑兒)다. 도고 세이지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미래파의 영향을 받은 화가다. ‘이과전’(二科展)의 대표 작가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예쁜 여자들을 잘 그렸다. 마치 화장품 광고에 나오는 여자 같은 분위기였다. 그는 연구소에서도 주로 여학생만 지도했다. 고가 하루에는 연구소에 잘 나오지 않았다. 아베 곤고는 일본식 초현실주의자라고 볼 수 있다. 초현실주의는 굳이 환상적인 장면만 묘사한다기보다 내부적 현실을 찾는 심층심리학과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아베 곤고의 초현실주의는 정통이라고 보기 어렵다. 후지타 쓰쿠지가 연구소에 참여하면서 연구소의 품격이 올라갔다고 볼 수 있다. 아방가르드 연구소의 선생들은 완전 추상계열 화가라고 보기도 어렵다. 큐비즘이건, 미래파건, 초현실주의건, 뭔가 비슷한 분위기를 보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래도 당시 일본화단과 비교하면, 진취적 화풍을 보이려고 노력한 집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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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 강사였던 도고 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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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 강사였던 고가 하루에.


하루는 아베 곤고가 나를 간다의 ‘캔들’(촛불)이라는 다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는 나보고 ‘너는 천재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때 천재라는 말을 난생처음 들었다. 하지만 미술에는 ‘소년 천재’가 있을 수 없다. 미술은 기술이 아니고 정신이기 때문에 어린 나이에 천재성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방가르드 연구소는 연구부가 있었는데, 내가 연구부장을 했다. 나이는 어린데, 미술이론에 밝은 척해서 그렇게 되었다. 나이에 비해 독서량이 많다 보니 주위로부터 주목을 받은 것 같다. 그래서 ‘천재’ 운운도 나왔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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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로르> 회지를 보면, 아리시마 이쿠마(有島生馬)의 화실에서 음악감상회를 여는 등 그의 비중이 컸던 것 같다. 그는 어떤 화가인가?

“내가 연구소를 다닐 때, 유명 강사로 아리시마 이쿠마가 있었다. 그는 귀족 신분으로 이탈리아 유학생 출신이었다. 이과전 멤버였고, 문화학원 교수이기도 했다. 그의 화실은 고급주택가인 고지마치(麴町)에 있었다. 화실 내부는 계단식이면서 넓었다. 특이한 사항은 그의 화실에 조르주 루오의 원화가 걸려 있었다는 점이다. 유럽 화가의 진짜 그림을 가지고 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인물화를 꼭 서양식으로 그렸다. 뒤에 아리시마 이쿠마는 나에게 ‘너는 어리니까 학교부터 먼저 다니라’고 권했다. 그래서 입학한 곳이 문화학원이었다. 하지만 문화학원보다 아방가르드 연구소가 내 취향에 더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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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기에게 문화학원 입학을 권유한 아리시마 이쿠마(오른쪽)와 친형 아리시마 다케오(왼쪽). 일본 귀족집안 출신 유학파로 막내 사토미 돈과 함께 3형제 모두 작가로 유명하다.


아리시마 이쿠마의 친형이 소설가 아리시마 다케오(有島武郞)다. 그는 ‘시라카바’(白樺) 동인으로 유명했다. ‘다케오의 정사(情死)’, 1923년 일본 사회를 흔들었던 유명한 사건의 주인공이다. 그때 40대 중년의 다케오는 젊은 여기자와 함께 산에서 자살했다. 생의 절정에서 죽은 것이다. 그의 주검은 부패한 뒤에야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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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시마 다케오(오른쪽)는 1923년 여성잡지 기자 하타노 아키노(왼쪽)와 유서를 남긴 채 자살해 ‘다케오의 정사’ 현상을 낳은 인물이다.


<로로르>(1937) 소식란에, 연구회의 2월 강좌로 아리시마 이쿠마의 화실에서 신향(新響) 지휘자 야마모토 나오타다(山本直忠) 초청 음악회를 소개한 적이 있다. 제목은 ‘음악에 있어서 시대성과 최근의 침로(針路)’였다. 야마모토 지휘자는 독일로 유학 가서 음악공부를 하고 돌아왔고, 내 친구 야마모토 나오타케(山本直武: 야마모토 란손의 본명)의 형이었다. 나오타케는 김환기, 세이노 가쓰미(淸野克己), 그리고 나와 함께 ‘범전’(汎展·1936) 동인이었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그 음악회 사회도 내가 맡았다. 스물한 살, 치기만만할 때였다.

아주 공손한 어투로 ‘야마모토 나오타다씨는 최근 베를린에서 들어왔습니다. 오늘은 그를 모시고 새로운 음악을 감상하는 날입니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 낙제였다. 그때 연구소의 분위기는 그랬다. 베를린 갔다 왔으면 왔지, 어쩌란 말이냐.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야마모토 나오타다씨는 최근 베를린에서 돌아온 모양입니다.’ 돌아왔다가 아니라 돌아온 모양이다라고, 독일 유학을 대수롭지 않게 표현했다. 그 시절 우리는 몬드리안의 합리주의나 바우하우스의 새로운 움직임에 대해서도 이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약간 건방지게 표현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런 나의 어투를 아주 재미있게 본 여성이 있었다. 뒤에 나의 연인이 된 후나코시 미에코(船越三枝子)다. 그날 음악감상회에서 우리는 새로운 레코드로 프랑스 음악가 ‘다리우스 미요’라든가 ‘아르튀르 오네게르’의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음악회다.”

아방가르드양화연구소 강사진 ‘쟁쟁’
큐비즘·미래파·초현실주의…‘진취적’
일본식 초현실주의자 ‘아베 곤고’
“나보고 ‘천재다’…이론 밝은척해서”


아리시마 이쿠마 권유 ‘문화학원’ 입학
“내 취향은 아방가르드가 더 맞았다”


중일전쟁 직전 일본은 ‘백화난발 시기’
조선인 유학생 아카데미즘-모더니즘 갈려
김병기·이중섭·문학수·김환기·유영국 등
문부성 주도 ‘제전’ 같은 관전 ‘외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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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7월 도쿄 긴자의 기노쿠니야 화랑에서 열린 자유미술가협회 제2회 전람회. 문학수와 유영국이 협회상을 받았고, 박생광·이중섭도 참여했다. 최근 도쿄국립신미술관 연구자들이 김병기에게 보내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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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일본화단의 동향과 견주어 조선인 화가들의 활동상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무엇보다 1937년 일본이 중국 대륙을 쳐들어가 중일전쟁이 터지기 이전까지는 백화난발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다양한 조류가 생기고 엉키면서 새로운 미술을 추구했다. 그때 조선인 유학생들은 두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도쿄미술학교에 재학하거나 문부성의 ‘제전’(帝展) 같은 관전에 참여하면서 보수적 아카데미즘을 추구하는 부류이다. 물론 이쪽의 숫자가 단연 많다. 또 다른 하나는 관전을 외면하고 새로운 모더니즘을 추구했던 부류로 이중섭, 문학수, 김환기, 유영국 등을 들 수 있다. 후자는 자유미술가협회, 미술창작가협회, 백만전 같은 곳에서 작품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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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자유미술가협회 제3회전에 낸 문학수의 ‘비행기가 있는 풍경’. 이중섭의 소 그림과 비교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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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자유미술가협회 제4회전에 출품한 문학수의 ‘춘향 단죄지도(斷罪之圖)’. 1937년 자유미술가협회 첫회부터 참가한 문학수는 일본 화단에서 ‘가장 반도인의 기상을 잘 표현했다’는 평을 받았다.


자유미술가협회 전시에 출품한 화가를 보면, 1937년 제1회전에 회우 자격으로 김환기가 <항공표지>를 출품했고, 문학수·유영국·주현 등이 참여했다. 여기서 주현은 이범승의 별명으로, 김병기가 지어준 이름이었다. 주현도 아방가르드 연구소를 다녔다. 그는 서울 출신이었지만 김병기와 인연으로 훗날 평양의 동인지 <단층>의 4호 표지화를 그리기도 했다. 제2회전(1938)에는 박생광·이중섭 등도 참여했다. 이때 문학수와 유영국은 협회상을 받고 회우로 추대되었다. 제3회전(1939)은 이규상이 추가되었고, 문학수가 ‘말’ 소재의 <비행기가 있는 풍경>을 출품했다. 제4회전(1940)은 김환기의 <섬 이야기>, 문학수의 <춘향 단죄지도(斷罪之圖)>, 유영국의 <작품 404> 연작, 그리고 안기풍의 작품이 출품됐다.

1940년 10월 미술창작가협회의 서울 전시에는 김환기·문학수·유영국·이규상·이중섭 등이 출품했다. 여기서 이중섭은 <망월> 등 ‘소’ 소재의 작품을 선보였다. 미술창작가협회와 자유미술가협회의 참여 작가는 비슷했고, 식민지 시기의 창작성을 담보하려 했다. 특기 사항은 김환기의 <항공표지>(1937)처럼 순수 추상의 작품과 더불어 문학수의 서사적 형상회화가 공존했다는 점이다. 문학수는 <비행기가 있는 풍경>이나 <춘향단죄지도>를 통해 말이나 소 같은 동물 소재를 적극 활용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형상화했다. 원경의 비행기 혹은 근경의 무릎 꿇고 죄를 기다리는 춘향의 모습, 그러면서 커다란 비중으로 화면을 장악하고 있는 말이나 소의 존재가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자유미술가협회의 총아는 문학수라 할 수 있다. 제5회 전시평에서 화가 이마이 시게사부로(今井繁三郞)은 이렇게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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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방가르드 연구소 시절 김병기가 활동했던 ‘범(판)전’에 대한 비평을 비롯 그무렵 조선인 화가들의 활동을 많이 소개했던 미술잡지 <비노쿠니>(美之國)의 1936년 11월호 표지.


“이 작가(문학수)를 존재하게 한 것 자체가 완전히 미술창작의 하나의 큰 공적이다. 이 단체 주재자들의 넓은 이해와 깊은 친절이 있었던 만큼 문학수는 성장했다. 이 단체가 육성한, 또는 성장한 작가들이 많이 있지만, 현재 문학수는 거기서 일등이다. 씨는 이름이 말해주듯 반도인이다. 이 단체에는 후에 나타난 이중섭을 비롯해 반도인이 많이 참가하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으로도 이 단체의 포용성을 알 수 있다. 물론 반도인 작가가 이 단체에만 참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모든 단체에도 출품하고 있지만 이중섭이나 문학수처럼 반도인적인 특성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는 작가가 다른 단체에는 없다는 점에 생각이 미치면 나는 다른 단체의 정치적, 또는 지고적 통치성의 소위 봉건적 획일성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의 나에게는 반도인의 민족성이 확실히 파악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약간의 지식과 이해로도 문학수나 이중섭의 작업이 이 민족의 특성을 훌륭히 발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비노쿠니>(美之國), 제17권 4호,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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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아방가르드 연구소 시절 김환기(맨 오른쪽)는 강사 무라이 마사나리(왼쪽 둘째)의 아파트 ‘포플러의 집’에서 1년간 기숙하기도 했다. 그 무렵 백만회를 함께 했던 길진섭(오른쪽 둘째)과 무라이의 부인(맨 왼쪽)도 보인다.


‘백만전’(白蠻展)은 1936~37년 길진섭과 김환기가 주도적으로 참여한 그룹전이다. 길진섭은 앞서 1930년에도 도쿄에서 새 미술 단체 백만회를 조직했다. ‘동인은 길진섭, 구본웅, 김응진, 리마동, 김용준 5인이며 도쿄 시외 노가타마치 시모사기노미야(와세다대 인근)에 임시 사무소를 두었으며 명년(1931년) 4월 경성에서 첫 전람회를 할 예정이다.’(<동아일보> 1930년 12월23일치) 같은 지면에 김용준이 ‘백만양화회를 맨들고’란 제목으로 쓴 창립선언문도 실려 있다. 도쿄미술학교 출신인 이들이 실제로 이듬해 경성에서 전람회를 열었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두 백만회는 다른 단체이긴 하지만, 같은 이름을 내건 것은 길진섭의 의지라고 생각된다. 1937년 11월 긴자의 일본살롱에서 ‘흑색·신현실·백만’ 합동전시를 한 적도 있다. 이때 후나코시 미에코가 출품한 이라는 콜라주는 오늘날 1930년대 일본 미술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길진섭과 백만전에 참여한 일본인 여성 화가 간노 유이코(菅野由爲子)가 각별한 사이로 알려졌는데 사실인가?

“백만(白蠻)은 ‘하얀 오랑캐’라는 뜻이다. 우리 민족을 염두에 둔 작명이라고 생각한다. 알다시피 길진섭은 3·1 독립운동 대표 33인의 한 분인 길선주 목사의 아들이다. 1932년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귀국했다가 다시 건너와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에 다녔다. 그는 평양 시절 삭성회 출신이기도 해서 은사의 아들인 내게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김환기와 길진섭은 가까운 친구처럼 지냈는데, 이들이 긴자 거리를 걸으면 일본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만큼 높게 솟았다. 길진섭의 백만전 출품작을 보면, 선에 속도감이 있는데 이는 고구려 기질의 표현이라고 본다. 김환기의 백제 스타일은 속도감 대신 오히려 장식적이라는 특징을 읽게 한다. 길진섭의 <어선>(1936년 6월 제2회전)이나 <선인장(사보텐)과 소녀>(1937년 3월 제4회전) 같은 작품을 보면, 있을 것은 다 있으면서 대상의 본질만 표현하려 했음을 알게 한다. 훌륭한 작가라고 생각한다.

간노 유이코는 나보다 열 살쯤 많았다. 한번은 사귀자고 제안했더니, 나보고 ‘정신 차려!’ 하면서 어린 녀석이라고 핀잔했다. 그러면서도 우리들은 매우 가깝게 지냈다. 그는 간다의 의사 집안 딸이었다. 그는 문학적 소양이 있었고, 특히 시인 보들레르를 좋아했다. 반면에 길진섭은 문학적 소양과 거리가 있었다. 그런데 언젠가 보니 그들은 연인 사이로 발전되어 있었다. 물론 이들 관계는 길진섭의 귀국으로 파탄이 났다. 간노 유이코는 후나코시 미에코와 아주 친했고, 내가 후나코시와 가깝게 지내자 중간에서 적지 않은 구실을 해주었다.”

구술·집필/윤범모 동국대 석좌교수

기획·진행/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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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의 회원 모집 포스터에 아베 곤고·고가 하루에·미네기시 기이치·도고 세이지 등 대표적인 지도강사 명단이 적혀 있다. 모두 당대 일본의 전위그룹 선두에 선 화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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