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사자 미수습 유해 발굴에 최선 / 잘못된 역사 바로잡고 평화 지켜내야
요코야마 히데코 원어민교사 |
작년까지 최전선에서 군복무 중이었던 아들이 지난겨울 교육을 받고 6·25전사자 유해발굴단에 들어갔다. 군인이 그런 일도 한다는 것을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고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의 권유로 고고학을 전공으로 하게 됐는데 군대에 가더니 여기서도 의도치 않게 발굴을 하라고 권유를 받았다는 것이다. 아들이 머무르고 있는 부대는 차로 한참을 달려야 볼 수 있었다. 그곳은 자동차 앞유리창이 다 초록색이 되어버릴 정도로 깊은 산속에 위치해 있었다. 작년에는 밤새 무기가 있는 창고를 지켜야 해서 잠도 못 자고 추운 겨울을 힘들게 났다는데 올해는 그런 고생이 없어지는 대신 매일 산으로 올라가서 삽이나 호미로 전사자 유해를 발굴하고 있다고 한다. 어떤 날은 통일전망대로 가서 홍보를 하면서 유가족을 찾아 DNA 검사를 의뢰하는 일을 한다고 하는데 어르신들이 고생한다고 사탕을 주기도 하고 과일을 먹으라고 깎아준다고 한다.
유해발굴은 나라를 위해 싸운 애국전사의 명복을 빌어주기 위해 시작했다고 한다. 6·25 때 전사자 22만 명 중 아직 수습되지 못한 유해가 12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당시 산에 그대로 방치돼 있는 사체 수가 어마어마해 마을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흙으로 덮어 매립했다고 전해졌다. 그런 곳이 몇 군데 더 있다고 하니 얼마나 격하고 비참한 전쟁터였는지 나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유골을 찾을 때는 탐지기도 있지만 역시 마을 사람들의 기억이 제일 중요한 정보라고 한다. 탐지기에서는 전혀 못 찾지만 마을 주민의 정보가 있어서 직접 발굴하는 데 너무 깊은 곳이어서 그런지 굴착기로 작업을 했더니 그들의 정보대로 유골이 발견됐다. 그때부터는 잔해가 손상되지 않도록 손으로 작업을 시작할 때도 종종 있다고 한다. 산에서 포클레인을 사용하려면 먼저 주위에 있는 나무들을 깨끗이 잘라내 기계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이번에 벌목을 했을 때 아들이 얼굴을 다쳤지만 크게 걱정할 정도가 아니었기에 다행이었다.
반세기가 지났는데도 한반도를 둘러싼 남북대치 상황은 변하지 않고 지금까지도 위협을 느낄 때가 많다. 과거에 일어났던 잘못된 역사를 해결하지 못하면 결국 다시 후세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 오늘날 우리가 후세에 남겨주는 것이 애국전사의 유골이나 바로잡지 않은 역사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번에 아들 면회차 작은 여행을 하면서 평화를 지킬 중요성을 새삼 느꼈다.
요코야마 히데코 원어민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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