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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7 (월)

[허연의 책과 지성] 헤르만 헤세 (1877~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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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세상은 쓴맛이 났다. 인생은 끊임없이 지속되는 극심한 고통이었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에 나오는 문장이다.

헤세는 특히 아시아권에서 가장 큰 파장을 일으킨 작가였다. 한국에도 '헤세 교도'들이 많았다. 청춘들은 '수레바퀴 밑에서' '데미안' '유리알 유희' '싯다르타'를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헤세를 섬겼다. 그의 소설에 짙게 깔려 있는 근원 탐구와 해탈에 대한 갈구는 우리에게 경전처럼 다가왔다.

헤세는 전형적인 독일인이었지만 내면은 그렇지 않았다. 헤세의 외할아버지는 인도어 학자였고 부모 모두가 인도에서 선교사 생활을 했다.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사촌 군데르트는 선불교 전문가였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헤세는 어린 시절부터 '우파니샤드' '도덕경' 등 동양의 경전을 섭렵했다. 결정적으로 서구 문명의 환멸을 가져다 준 계기는 1차 세계대전이었다. 끝없는 인간의 잔혹함을 목도한 후 인도 여행을 다녀온 헤세는 윤회를 믿는 동양사상의 신봉자가 됐다.

헤세의 세계관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소설이 '싯다르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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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주인공 싯다르타는 부처님(고타마 싯다르타)과 이름이 같은 인물이다. 그는 부족함이라고는 없는 인도 브라만 집안에서 태어난다. 언뜻 보면 싯다르타에게 삶은 풍족함과 기쁨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지식이나 현실의 안락함으로도 채울 수 없는 공허가 그를 찾아온다. 그는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정신적 갈증을 채우기 위해 친구 고빈다와 수행의 길을 떠난다. 하지만 수행도 질문의 답이 되지 못했다. 직접 부처님을 찾아가 설법을 듣기도 하지만 제자가 되기를 거부하고 다시 세속으로 돌아온다. 보통 사람들 속에 도(道)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그는 세속으로 돌아와 카밀라를 만나 아이를 낳고, 상인에게서 돈을 버는 법을 배우고, 도박에 빠져 재산을 탕진하고, 가난뱅이 뱃사공이 되는 등 삶의 모든 편린을 경험하지만 그 어느 것도 구도의 길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그러던 싯다르타에게 스승이 한 명 나타난다. 바로 아들이었다.

자신이 집을 나온 다음 태어나 어머니의 사랑만 받으며 자란 아들은 거지꼴을 한 뱃사공 아버지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먼 발치에서라도 아들을 보고 싶어하는 싯다르타의 소원조차 들어주지 않는다.

아들에게 멸시를 받으며 그는 깨닫는다. 자신에게 그토록 잔인한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그 아들을 미친 듯이 사랑하는 그 마음이 완전한 자아이자 진정한 사랑이었음을.

싯다르타는 사랑을 몰랐던 것이다. 집을 박차고 나온 자신을 기다려준 부모의 사랑, 조건 없이 안식처를 만들어 준 카밀라의 사랑, 묵묵히 도반을 자처한 친구 고빈다의 사랑. 그리고 더 나아가 우주 만물이 모두 사랑임을 몰랐던 것이다.

"이 세상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하여,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놔둔 채 그 자체를 사랑하기 위하여, 그리고 기꺼이 그 세상의 일원이 되기 위하여. 죄악이 필요했고 쾌락과 욕심이 필요했다는 것을 알았네. 그리고 사랑을 깨닫기 위해 가장 수치스러운 절망도 필요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거리 곳곳에 등장한 연등을 보며 서구 문명을 버리고 안식을 얻은 헤세의 삶이 생각났다.

나는 얼마나 작은가. 나는 얼마나 사랑을 모른 채 살고 있는가.

[허연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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