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청담동 SM엔터테인먼트 연습실에서 거울을 등지고 선 강타. 그는 요즘 출연하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너무 재미없어 `아시아의 노잼`으로 통하지만 "기대치가 없으니까 오히려 좋다"고 말했다. [한주형 기자] |
그룹 'H.O.T.'는 1996년 가요계를 강타하며 아이돌 시대를 열었다. 2001년 해체될 때까지 히트곡 '캔디' '전사의 후예' '빛' 등으로 소녀들의 심장을 강타했다. 메인 보컬로 무대를 장악했던 '원조 아이돌' 강타 SM엔터테인먼트 이사(본명 안칠현·38)는 이제 불혹을 내다본다. 하지만 금발과 매끈한 피부는 나이를 무색하게 만든다. 최근 서울 청담동 SM엔터테인먼트 사옥에서 만난 그는 카메라 앞에서 다양한 표정과 동작을 알아서 척척 만들어냈다. 사진기자의 별도 요청이 없어도 스스로 웃고, 스스로 슬퍼졌다. 이게 바로 데뷔 21년 차의 내공이다.
요즘 그는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 DJ로 차분한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고정 출연하는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아시아의 노잼(No+재미)'으로 통한다. 교수처럼 진지하게 말해 아시아 대표급으로 재미가 없다는 핀잔을 자주 듣는다. 그는 "기대치가 없으니까 오히려 좋다"고 말했다. "솔직히 사람들이 자꾸 재미없어 해서 고민이었죠. 게스트로 제가 나오면 다른 출연진들이 '망했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근데 개그맨 동생들이 '노잼이란 캐릭터 덕분에 형이 진지하게 말해도 방송에서 편집을 안 한다'고 위로하더군요. 그 후 마음이 편해졌어요. 어쩌다가 한두 번 웃기면 '생각보다 괜찮은데?'라고 칭찬하니까요." 달관의 경지에 이르렀지만 '아이돌의 시조새' '아이돌의 조상' '원조 아이돌'이라는 수식어가 달갑지는 않을 것 같다. 그는 "이제 익숙해졌다"며 "세월은 흐르는 건데 나만 거북해하면 스트레스를 받는다. 원조도 상당히 의미 있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시간이 속절없이 흐르는 동안 연륜은 쌓였지만 인기는 사그라들었다. 음악과 결혼, 미래는 여전히 풀기 어려운 숙제일 것 같다. 요즘 고민을 묻자 그는 "연차가 쌓일수록 모든 현상을 보는 게 심플해졌다"고 답했다. "H.O.T.가 해체됐을 때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었고 음악적 무게가 컸어요. 가수라면 모든 노래를 다 제가 작곡해야 한다는 강박이 컸죠. 그땐 옷도 정장만 입고 다녔어요.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내 곡을 쓰다가도 다른 사람이 쓴 더 좋은 곡이 생기면 그걸 내가 노래 부르면 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하게 됐죠. 혼자 고민하는 것보다 회사 의견을 참고하니까 좀 편해졌어요. 지금은 오퍼(제안)가 들어오면 회사에 먼저 판단해달라고 합니다."
일보다는 오히려 개인적인 고민이 깊어진다. 바로 결혼이다. 그는 "하늘을 봐야 별을 따는데 3년째 연애도 못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마음이 생겨도 '저 사람이랑 연애하면 결혼까지 해야 하는 것 아닐까'라고 고민해요. 만날 약속을 잡다가도 이것 때문에 안되고 저것 때문에 안되고…. 이런 걸 따지는 순간 '연애할 때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주변에서 '연애 세포가 죽는다'며 걱정을 해요. 사실 몇 시간 못 자도 만나러 가는 게 연애죠. 그런 열정이 있어야 하는데 예전같지 않네요."
―감정이 크지 않아서 그런 것 아닐까요.
▷감정이 커질 수 있는 상황에도 자꾸 (마음을) 잠가요. 미리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서요. 만나보고 소통해야 좋아지는 건데 그것 자체가 요즘 안돼요. 미래를 위해 가정을 꾸려야 하는데…. 쉬는 날에는 누굴 만나기보다는 푹 쉬고 싶어요. 그러니까 취미 생활도 혼자 하는 게 많아져요.
―어떤 취미인가요.
▷피겨나 프라모델을 모으고 있어요. 20대 후반에는 주책맞은 것 같아 주저했는데 30대 후반되니까 '뭐 어때서'라고 생각하게 됐죠. 가게에 가면 제 또래 남자들이 아들 선물을 골라주더군요. 혼자 노는 취미 생활이 생겨서 그런지 연애와 많이 멀어지고 있어요.
그는 2014년 가수 보아와 함께 SM엔터테인먼트 비등기이사에 올랐다. 회사 성장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고 후배들의 롤모델로 꼽힐 정도로 리더십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직책의 무게를 느끼는 강타는 회사 공식 행사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있다. 연습생들의 쇼케이스를 평가하고 조언하는 것도 그의 주요 업무다.
―20년 전과 비교하면 요즘 연습생은 어떤가요.
▷일단 연습생 같지 않아요. 기본적인 것을 다 배워오니까요. 오디션에서 어느 정도 실력이 쌓여 있는 준비된 사람을 뽑아요. 트레이닝 과정에서 더 좋아지니까 (춤과 노래) 완성도가 높죠. 하지만 트레이닝을 똑같이 받다보니 보컬이나 춤의 성향이 좀 비슷해요. 예전에는 각자 무대 매너가 달라 한 명 한 명 다른 매력과 재미를 보여줬는데 지금은 트레이닝을 받아서 능숙하지만 좀 일률적인 느낌이에요. 그래서 트레이닝 과정에서 개성을 키워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 눈에도 다 똑같아 보입니다.
▷어, 그럼 늙었다는 증거인데요(웃음). 사실은 저도 다들 너무 잘해서 똑같아 보여요. 저희 때는 담당이 확실해서 그것만 집중적으로 했었죠. 누구는 말 잘하고, 누구는 보컬 잘하고, 누구는 춤 잘추고…. 각자 색깔이 확실했어요. 지금은 멤버 수가 더 늘어나서 개성 있는 멤버가 많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쉽지가 않아요. 신인 때 기본기를 배워야 하는데 개성까지 표출하라고 하기는 어렵죠. 그래도 트레이닝 시스템은 진화해야 합니다.
―오랫동안 연습생들을 지켜봤는데 누가 성공할지 보이나요.
▷반반입니다. 데뷔 전에 괜찮다고 생각한 친구(연습생)가 그대로 인기를 얻을 확률은 딱 50%예요. 연습생 때는 몰랐던 끼가 매스컴을 타면서 발산되는 경우가 있거든요.
―후배들에게 조언을 많이 해 주는 선배로 꼽히던데요.
▷아이들을 이끌고 싶고 소통하고 싶어요. 근데 회사에서 '동방신기'나 '슈퍼주니어' 이후 데뷔한 친구들과 갭(세대 차이)이 좀 있어요. 내가 자꾸 만나자거나 얘기하려고 하면 (후배들이) 불편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주저해요. 저도 선배들과 자리가 어려웠거든요. 최대한 말을 아끼고 후배들과 같이 공연할 때 소통하고 조언을 해줍니다. 어찌됐든 인기를 얻은 다음에 선배 말씀이 기억나고 도움이 되거든요.
―어떤 조언을 주로 해주나요.
▷지금 관객들은 선배들의 팬이지만 너희 팬으로 바꾸겠다는 야망을 가져라. 그리고 첫 무대에 섰을 때 멤버들과 약속한 대로 해야 한다. 팀워크가 가장 중요하다. 초심을 지켜라. 그리고 남자든 여자든 멋이 있어야 한다. 신인 때는 신인다운 멋, 시간이 흐르면 능숙한 멋이 있어야 한다.
―스타가 되기 위해 SM엔터테인먼트를 찾아오는 어린 학생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솔직히 제가 어렸을 때 생각이 많이 나서 부러워요. 저는 중학생 때부터 오디션을 봤는데, 그 시절에는 너무 어리면 '집에 가'라고 쫓았어요. 노래방에서 녹음한 테이프, 비디오 카메라로 찍은 춤추는 영상을 가져갔는데 보지도 않았어요. 아역 탤런트 빼고는 '무슨 중고딩이 가수냐'는 분위기였죠. 지금은 초등학생 때부터 '나는 가수가 꿈'이라고 얘기하고, 그런 친구를 오디션으로 봐줄 수 있는 시스템이 아주 커졌고, 그런 방송도 있으니까 부러워요. 한편으로는 '이런 시대라면 과연 내가 경쟁률을 뚫을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도 들어요. 워낙 잘하는 친구들이 많거든요. 감성적으로 보면 안쓰럽다는 생각도 들어요. 오디션에서 계속 고배를 마시는 친구도 많고, 열심히 해서 데뷔해도 아이돌이 워낙 많으니까요. 팀이 인기를 얻어도 전체 멤버가 살아남기도 어렵고요.
―연간 몇 명이 SM엔터테인먼트 오디션에 참가하나요.
▷매주 200~300명이 오디션을 봐요. 엄청난 경쟁률을 뚫은 친구들을 어떻게 키우냐가 더 문제죠.
―오랫동안 인기를 누려왔는데요. 스타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서비스업 종사자요. 인기가 많을수록 서비스업 종사자가 됩니다. 본인이 힘들어도 웃어야 해요. 방송에서 노래하는 모든 분들이 매일 노래하고 싶은 건 아니에요.
■ 중국팬들 한번 눈도장 찍으면 쉽게 안떠나…한류 계속 찾을것
―장밋빛 삶은 아니군요.
▷누군가가 저를 알아봐주는 게 부담스러울 때도 있지만 그게 좋아서 하는 거 아닌가요. 스타는 기본적으로 장밋빛 인생이라고 봐요. 본인이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니까. 사생활이 없어 힘들어하는 연예인도 있지만 사생팬이 생겼다는 것 자체가 목표를 성취했다는 증거 아닐까요. 알아봐주는 사람이 없어지면 오히려 서운하죠.
―H.O.T. 해체 후 인기는 얼마 만에 사라졌나요.
▷ 표면적으로 눈앞에서 사라지는 데 딱 3년 걸렸어요. 3~4년 안에 제가 팬덤으로 할 수 있는 공연은 없어졌어요. 그래도 거품이 공기가 되어 있어요. 예전 팬들이 저를 따라다닐 수는 없어도 TV에 나오면 멀리서 응원하고 있더라고요..
―거품이 꺼질 때 절망감이 어느 정도였는지.
▷ 그때는 아무것도 하기 싫었어요. 사실 저희(H.O.T.)는 데뷔하고 정말 금방 인기가 많았거든요. 첫 방송이 토토즐(쇼 프로그램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이었는데 월요일에 집 앞에 벌써 (팬) 200명이 와 있더라고요. 그것에 쭉 5년간 익숙해져 있었어요. 해체 후 솔로 앨범 1집까지만 해도 팬덤이 이어졌는데 그다음부터 1년이 다르게 팬덤이 사라졌어요. 아무리 주변에서 인기는 금방 꺼진다고 해도 '이게 설마 금방 사라질까'라고 생각했는데…. 중국 활동을 시작하면서 많이 달라졌어요.
강타는 2003년부터 지난해까지 주로 중국에서 활동했다. 2000년 H.O.T.가 중국 궁런(工人) 체육관(1만석)에서 공연한 후 대륙에서 인기가 치솟은 덕분이다. 강타는 현지에서 연간 영화 두 편과 드라마 한 편을 찍었을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중국 활동은 힘들지 않았나요.
▷ 중국에서 H.O.T.가 인기를 얻자마자 해체됐어요. 제가 솔로로 갔을 때는 H.O.T. 후광은 있었어도 시스템이 지금 같지도 않았고 숙소도 허름했죠. '지금 고생하지만 나보다 훨씬 더 서럽게 시작한 분들이 대부분이야'라고 생각하니까 열정이 생기더군요. 5~6년 활동하니까 중국 거리에서 '저 사람이 안치쉬안(안칠현)'이라고 알아보는 젊은 분이 많아졌어요.
―중국어는 좀 늘었는지.
▷ 사실 작년에 처음 레슨을 받았어요. 드라마 대본을 외워 입 모양을 맞췄지만 성조(聲調) 등 기본을 제대로 배워야 할 것 같아서요. 중국 사극은 대만이나 홍콩 배우가 나올 때도 성우가 더빙을 하죠. 그런데 현대극은 동시녹음으로 바뀌는 추세여서 배우로서 경쟁력을 가지려면 정확한 딕션(발음)을 공부해야 해요.
―중국 정부의 한한령(한류금지령) 조치로 국내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타격이 큽니다. 언제까지 지속될 것 같은가요.
▷ 워낙 인구도 많고 땅도 넓지만 중국 대중은 한번 눈도장을 찍으면 오랫동안 즐기는 성향이 커요. 국교가 단절되지 않는 한, 한류를 계속 찾을 거라고 생각해요. 한국 아티스트에게도 중국은 빼놓을 수 없는 무대죠.
강타는 중국에서 활동하면서 초심을 자주 떠올렸다. 오금중 재학 때 '서태지와 아이들'에 열광한 그는 가수의 길을 결심했다. 나이가 어려 오디션에서 외면당했는데 의외로 길거리에서 발탁됐다. 오금고 1학년 때 서울 잠실 롯데월드광장에서 또래들과 춤 배틀을 벌이는 모습이 SM엔터테인먼트 관계자에게 포착됐고 가수 제안과 함께 명함을 받았다. 다음날 학교에서 춤 잘 추는 아이를 찾아보라고 친구 누나가 준 명함도 같은 사람이라 믿음이 생겼다. 당시 MC로 활약하던 이수만(현 SM엔터테인먼트 회장)이 설립한 회사로 가수 유영진, 현진영이 소속돼 있어 곧바로 찾아갔다.
―2년간 연습생 시절은 어땠나요.
▷ 힘들긴 했지만 춤과 노래가 너무 좋으니까 연습도 좋았어요. 긴장감 때문인지 시간이 빨리 갔죠. 어느 날 매니저 형들이 쌀쌀맞게 대하면 '혹시 나 데뷔 못 하나, 다른 친구에게 밀리면 어떻게 하지' 걱정의 연속이었어요.
―편의점에서 끼니를 때우면서 연습했다면서요.
▷ 주변에 인디밴드나 레이블 회사를 운영하는 친구들이 있는데 돈이 어마어마하게 들더라고요. 밥값도 엄청나고요. 그 시절 이수만 선생님이 출연료로 회사를 운영하셔서 연습생까지 제대로 챙길 여유가 없었어요. 세 끼를 먹어도 배고프던 시절이라 2500원짜리 소시지 한 통을 사서 시간당 3개씩 먹으면서 새벽까지 연습했죠.
―그렇게 힘들게 시작한 H.O.T.가 해체됐을 때 심정은요.
▷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어요. 멤버 3명(토니안 장우혁 이재원)의 (SM엔터테인먼트와 전속) 계약이 끝났어요. 다만 그때 멤버 5명이 모여 더 소통을 할 수 없었다는 게 아쉬워요.
―재결성 가능성은 있나요.
▷ 마음은 항상 있지만 5명의 현실적 상황을 종합하는 게 어렵더라고요.
―아이돌의 롤모델로 꼽히는데 본인의 롤모델은 누구인가요.
▷ 좀 뻔하지만 어찌됐든 이수만 선생님일 수밖에 없죠. 그런데 전 그렇게 못 될 것 같아요. 선생님은 주변에 휘둘리지 않고 냉철하고 신속하게 뭔가를 결정합니다. 처음에 저에게 중국에 가라고 할 때도 '강타야, 그냥 가, 거기에 너의 미래가 있어'라고 말씀하셨죠. 선생님은 당장 효과가 없는 일이라도 끝까지 밀어붙여 굉장한 성과를 내세요. 음악적으로는 영진이 형을 존경합니다. 음악 색깔이 정체돼 있지 않고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내죠.
―요리를 좋아해 중국식 샤부샤부 '훠궈' 레스토랑을 열려고 했다던데.
▷ 예전부터 회사와 같이 훠궈 사업을 하는 게 꿈이었어요. 얘기는 지금도 많이 나누고 있어요. 선생님(이수만)도 관심 있으세요. 2001년부터 훠궈를 즐겨 먹어 왔고 회사 후배들에게도 전파했죠.
―요리를 배운 계기는요.
▷ 2005년 사귀던 여자친구에게 해주려고 배웠어요. 이탈리아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정성을 표현할 때 해주는 음식이 리소토라 만들어봤어요. 하루이틀 육수를 우려내서 생쌀을 불리고 조리는 과정이 힘들었어요. 잘 안 되다가 어느 순간 그 맛이 났을 때 희열이 있더라고요. 이벤트를 해주려고 배웠다가 요리의 매력을 알게 됐죠.
―다시 태어나면 어떤 직업을 택할건지.
▷ 음악이요. 음악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직업이 좋은 것 같아요. 그게 저랑 잘 맞아요.
―평소 건강 관리는 어떻게 하나요.
▷ 청계산에 자주 오르고 비타민과 오메가 10종류를 챙겨 먹어요. 아침에 그것만 먹어도 배가 불러요.
―강타 이사가 쏘는 회식을 기다리는 직원이 많다고 하는데요.
▷ 몇 년 전까지 1년에 한두 번 했어요. 그런데 직원이 600명을 넘어 테이블을 한 바퀴 돌면서 술을 마시면 (만취해서) 집에 바로 가야 해요.
■ 강타는 누구
197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96년 오금고 재학 때 그룹 'H.O.T.'로 데뷔한 후 아이돌 스타로 인기를 누렸다. 2001년 그룹이 해체된 후 솔로 음반 '폴라리스(북극성)'로 각종 음악 차트 1위를 휩쓸었다. 2003년부터는 주로 중국에서 활동하면서 한류 열풍을 이끌었다. 2003년 중국 골든디스크 '해외음반특별상'을 수상하고 2004년 중국 인민대회당에서 콘서트를 열었으며, 중국 금호상 최고 해외인기가수상을 받았다. 2006년 대만 인기 가수 바네스와 듀오로 발매한 음반 '스캔들'이 각종 중국어 차트 1위를 차지했다. 2011년 중국 드라마 '고추와 김치', 중국 사극 '제금' 주연을 맡았고 2012년 중국 영화 '비밀화원', 2015년 중국 무협 영화 '제공' 주인공으로 활약했다.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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