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이 경찰 수사과정을 비방하는 내용을 담아 책을 낸 작가를 명예훼손 등 혐의로 구속했다. 이 작가는 “재심을 받을 수 있게 해 주겠다”며 200억원대 사기 사건으로 복역 중인 수형자 및 그의 가족과 공모해 사실과 다른 내용을 책에 쓴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은 공무집행을 방해하는 ‘가짜뉴스’와 ‘가짜출판물’에 대한 수사를 확대하겠다고 나섰다.
서울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는 ‘압수수색 영장이 조작됐다’는 허위 사실을 기재해 경찰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등으로 논픽션 작가 서모씨(73)를 구속하고, 서씨와 공모한 4명을 불구속 입건했다고 27일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서씨는 지난해 4월 <한국의 죄와벌 제2탄:누가 탑헤드를 죽였는가>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이어 같은해 10월에는 시리즈로 <한국의 죄와벌 제3탄 : SK 최태원 회장과 이철성 경찰청장께 보내는 특별 편지>를 출간했다.
서씨는 두 권의 책에서 200억원대 투자사기로 유죄를 선고받은 탑헤드비전의 전 회장 이모씨(60)가 억울하게 유죄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씨는 지난 2013년 특경가법상 사기죄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중국과 브라질 등지에서 사업을 하게 됐다며 예상이익을 뻥튀기하는 방식으로 노인들을 현혹해 2865명에게 약 211억원을 뜯어낸 혐의를 법원이 인정해서다.
이전에 몇 권의 책을 쓴 서씨가 이씨와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2015년. 구속된 남편을 면회온 이씨의 부인 전모씨(55)가 서울구치소 앞에 가판을 열고 책을 팔던 서씨와 만나면서다. 사회 비평 성격의 에세이집 <한국의 죄와벌 제1탄>을 팔던 서씨에게 전씨는 “억울한 남편을 도와줄 수 있냐” 물었다. 이에 서씨가 “책을 펴 내면 재심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답하면서 모든 일이 시작됐다.
이후 서씨는 두 차례 이씨를 직접 면회하고 부인 전씨를 통해 편지를 주고받는 방식으로 내용을 논의해 ‘경찰이 부당수사를 했다’는 취지의 비방성 내용을 책에 담았다.
경찰은 이 가운데 ‘경기남부경찰청이 압수수색 영장을 위조했다’고 쓴 부분이 명확한 허위사실에 해당한다고 보고 서씨와 이씨, 부인 전씨, 이씨와 함께 사기죄를 선고받아 형을 살고 출소한 탑헤드 전 이사 박모씨(48)를 모두 출판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입건했다. 서씨는 ‘판사의 인장이 다르다’ ‘압수수색 영장 천공의 크기가 다르다’ ‘담당 수사관의 필체가 아니다’ 등 근거를 들어 영장이 조작됐다고 주장했다.
경찰은 작가인 서씨가 ‘경찰 압수수색이 위법하다는 사실을 밝혀내면 재심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며 ‘영장 위조 시나리오’를 먼저 제안한 것으로 보고 있다. 복역중인 이씨는 “일이 잘 되어 내가 풀려나면 회사에 고문으로 고용해 매달 300만원씩 월급을 주겠다”고 서씨에게 약속했다고 경찰은 밝혔다.
서씨는 투자사기 피해자들을 모아 이씨 구명 활동을 펼치는 데도 직접 나섰다. 투자사기 피해자들에게 ‘책을 통해 여론을 환기시키면 이씨가 석방될 수 있다’고 설득해 책값과 작가후원비 명목으로 2만원부터 많게는 1600만원까지 총 2400만원을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해 11월에는 50명의 투자사기 피해자들과 함께 탑헤드 사건을 수사한 경기남부경찰청에 앞에서 담당 수사관의 실명이 적힌 현수막을 들고 “악질경찰 물러가라”며 항의집회를 열기도 했다. 노인들이 대다수인 사기 피해자들은 대부분 책 내용을 사실로 믿고 있다고 경찰은 전했다.
서씨는 피해자들을 설득해 허위 사실로 이씨 사건 담당 수사관 등 경찰 13명을 고소·고발한 혐의(무고)도 받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서씨는 사실관계를 잘 모르는 사기 피해자들로부터 인감증명서를 건네받아 고소·고발장 내용을 직접 작성해 우편으로 부쳤다. 경찰은 서씨가 책값과 작가후원비 명목으로 받은 돈에 고소·고발장을 쓰는 등의 일에 대한 대가도 포함된다고 판단해 면허 없이 법률사무를 대신한 혐의(변호사법 위반)도 추가했다.
경찰이 수사에 나서게 된 것은 김모 경위 등 고소·고발을 당한 경찰관이 서씨 등을 명예훼손으로 맞고소하면서다. 수사 과정에서 경찰은 서씨가 이전에 이씨를 변호한 변호사를 협박해 돈을 뜯어낸 혐의도 찾아냈다고 밝혔다. 서씨는 부장판사 출신인 변호사에게 과도한 수임료를 받았다며 ‘돈을 내놓지 않으면 전관예우 등을 문제 삼는 기사를 쓰겠다’고 협박해(공갈) 3000만원을 받아 부인 전씨와 절반씩 나눠가진 것으로 조사됐다.
당초 경찰은 서씨의 책을 내 준 출판사 대표 김모씨(55)도 명예훼손 혐의로 함께 입건했지만, 김씨가 인쇄비로 985만원을 받았을 뿐 책 내용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다고 보고 김씨에 대해서는 불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넘길 예정이다.
경찰 관계자는 “정당한 공무집행에 대한 의지를 훼손하는 악의성 고소·고발에 대한 수사를 강화하고, 허위사실 유포로 사회적 갈등을 야기하는 가짜뉴스·출판물에 대한 수사를 확대할 것”이라고 밝혔다.
최미랑 기자 ra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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