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1948년 정부수립 이후 69년 동안 수많은 선거가 있었고, 이를 통해 오늘의 모습을 만들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그 시절 그 선거를 사진으로 추억해봤다.
(왼쪽부터)1948년 8월 15일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축하 기념식, 제2공화국 대통령에 선출된 윤보선씨의 모습, 1967년 5월 3일 5.3 대통령 선거 개표 속보판의 모습, 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된 대통령 입후보자 포스터 /조선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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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공화국
1948.5.10 광복이후 제헌의회를 구성하기 위해 선거를 하는 모습. /국가기록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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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5·10 총선거는 광복 이후 제헌의회를 구성하기 위해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치러진 의미있는 선거다. 두달 후인 7월엔 제헌국회에서 초대 대통령 선거가 간선제로 실시됐다. 선거 결과 180표를 얻은 이승만이 13표를 획득한 김구를 누르고 당선됐다.
1952년 7월 4일 이승만은 대통령 직선제를 요지로 한 개헌안을 심야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이후 8월 5일에 치러진 선거에서 이승만은 조봉암, 이시영 등을 누르고 74.6%의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다. 1954년엔 대통령의 연임제한을 철폐하는 4사5입 개헌을 강행해 장기집권의 토대를 마련했다.
1960년 3월15일,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여당(자유당)과 정부는 전국적·조직적인 부정선거를 감행했다. 이에 이승만이 100%의 득표율로 당선되었으나 4ㆍ19혁명으로 하야했다.
1948년 7월. 초대 이승만 대통령(1대 재임 1948.07~1952.08) 취임식에서 선서하는 모습. /국가기록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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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4월. 1952년 대통령선거 포스터.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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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5월10일. 제1회 전국 도의원 선거.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전국 도의원선거 투표를 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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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8월5일. 제2대 정·부통령 선거 투표함을 옮기는 모습. /국가기록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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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3월15일, 민주당 중앙당본부의 3.15선거 무효선언을 하자 울분에 싸인 시민들이 민주당본부앞에서 시위 중인 모습. /조선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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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공화국
1960년 08월 12일.제2공화국 대통령에 선출된 윤보선씨가 자택에서 부인 공덕귀 여사 등 가족들로부터 축하를 받고 있다. /조선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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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19 혁명으로 새롭게 집권한 민주당은 내각제 하에서의 대통령과 총리 자리를 두고 신파와 구파 간 갈등을 빚었다. 구파의 대표였던 윤보선은 신·구파의 협상에 의해 8월 12일제4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하지만 구파와 신파가 국정운영 과정에서 대립했고, 1961년 5·16 군사정변이 발생했다. 이후 윤보선은 군부세력과 갈등을 빚다가 1962년 3월22일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1960년 08월 12일. 윤보선 씨가 국회 양원 합동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 된 후 사진기자들의 플레시 세례를 받고 있다. /조선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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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공화국
1963년 10월. 제5대 대통령 후보 선거 벽보가 붙은 모습/ 국가기록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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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0월 15일 제5대 대통령 선거가 직선제로 실시됐다.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박정희는 46.6%를 득표, 45.1%의 득표율을 얻은 민정당의 윤보선을 근소한 차이로 이기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리고 1963년 12월 27일 제3공화국이 정식 출범했다.
재임에 성공한 박정희는 1969년 대통령의 3선연임 허용을 골자로 3선 개헌으로 장기집권의 토대를 마련했다.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53%의 득표율을 얻어, 45.3%의 지지를 받은 김대중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됐다.
1963년 10월 15일. 서울시민들이 제5대 대통령 선거 투표를 하려고 줄을 서 있는 모습/ 국가기록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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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4월 24일. 대구에서 공화당은 황소를 상징동물로 정하고 대통령 선거운동을 벌였다./ 조선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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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4월 1일. 신민당원들이 제6대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한 윤보선씨의 피켓을 들고 종로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조선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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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5월 3일 5.3 대통령 선거 개표 속보판./ 조선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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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4월 2일. 수원지역에서 열린 김대중 신민당 대통령 후보의 연설회에 참석해 자전거위의 막걸리 통에 앉아 경청하고 있는 청중./ 조선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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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4월 8일.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거리에 선거 벽보가 나붙었다. 박정희 김대중 박기출 성보경 이종윤 진복기 김철 등이 입후보 했다./ 조선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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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4월 10일. 제7대 대통령 선거 신민당 부산유세에서 지원연설을 한 김영삼씨가 김대중 후보이 손을 들어주며 지원을 호소하고 있다./ 조선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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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공화국
1972년 12월 23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제8대 대통령 선거를 위해 대기하고 있는 모습./ 국가기록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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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0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유신헌법이 제정되고, 두달 후인 12월 23일 제8대 대통령 선거가 간선제로 치러졌다. 박정희는 99.9%의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1978년 7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의 99.8% 지지로 박정희가 제9대 대통령으로 당선됐지만, 1979년 10·26사태로 사망했다. 이에 1979년 12월, 대통령권한대행을 맡았던 최규하가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하지만 6일 후 전두환 등 신군부에 의한 12·12 쿠데타가 일어났다.
1972년 12월 23일. 장충체육관에서 치러진 제8대 대통령 선거 투표함을 개봉하는 관계자들의 모습./ 국가기록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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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7월6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통령 선거 투표 모습(세종문화회관)/ 국가기록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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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2월 06일.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통일주체 국민회의 10대 대통령 선거에 참석한 모습(장충체육관)/ 국가기록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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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1967년 4월 24일 대구에서 공화당이 상징동물로 정한 황소의 모습, 1958년 5월 10일 제 1회 도의원 선거 투표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모습, 1978년 7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통령 선거 투표 모습, 2002년 12월 19일 전통복장을 한 논산시 연산면 송정리 한학마을 사람들의 투표 모습 /조선DB, 국가기록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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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공화국
1980년 10월, 대통령 임기 7년 단임과 간선제에 의한 대통령 선출을 골자로 하는 헌법 개정안이 공포됐다. 제12대 대통령 선거는 전국 77개 선거구에서 '대통령선거인단' 투표로 실시됐다. 결과는 전두환 후보가 90.1%의 압도적 지지를 얻어 야당후보였던 유치송, 김종철, 김의택 등을 물리치고 당선됐다.
제6공화국
1987년 11월 23일. 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한 대통령 입후보자 포스터를 직원들이 검토하고 있다./ 조선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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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29일 민주정의당 대표 노태우가 국민들의 민주화와 직선제 개헌요구를 받아들여 이른바 6·29선언을 발표했다. 이에 5년 단임의 대통령직선제로 헌법이 개정되고, 같은해 12월 16일 제13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여당의 노태우와 야당의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이 출마하여 노태우가 36.7%의 지지율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김영삼은 28%, 김대중은 27.1%, 김종필은 8.1%의 지지를 얻었다.
1987년 12월 12일. 노태우 민정당후보의 여의도 유세./ 조선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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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2월 16일. 대통령선거 개표도중 투표함에 의문을 제기한 재야학생들이 개표장인 구로구청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자 경찰이 검거작전을 펴고있다.옥상에서 시위를 벌이는 이들에게 소방차가 물세례를 뿜고 있다./ 조선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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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2월 17일. 대통령선거에서 당선이 확정된 노태우 민정당 총재가 당원들의 환영을 받으며 당사에 들어서고 있다./ 조선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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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 중인 주민의 모습./ 국가기록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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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1월 30일. 서울 중구 한 인쇄소에서 경찰입회하에 14대대통령선거투표용지를 인쇄하고 있다./ 조선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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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영삼, 김대중, 정주영, 박찬종 등이 출마해 민주자유당의 김영삼이 42%로 당선됐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는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권영길 등이 출마해 김대중이 40.3%의 지지를 얻어 당선됐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노무현, 이회창, 권영길 등이 출마해 민주당의 노무현이 48.9%의 지지율로 당선됐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이명박, 정동영, 권영길 등 10명의 후보가 출마했다. 결과는 한나라당 이명박이 48.7%로 당선됐다.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박근혜, 문재인 등 6명의 후보가 출마해 새누리당 박근혜가 51.55%로 당선됐다.
1992년 12월 1일. 14대 대통령 선거기간 중 국민당의 김동길, 이주일 씨가 유세 현장에 모인 청중들 앞에서 다정하게 포즈를 취해 웃기고 있다./ 조선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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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1월 28일. 15대 대선 투표용지 견본./ 조선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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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1월 30일.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가 경북 포항시 구룡포 부두를 방문, 오징어잡이 배 선원들에게『기호3번』을 찍어달라 호소하고 있다./ 조선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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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2월 19일. 제16대 대선이 치러진 19일 밤 서울의 개표장에서 개표요원들이 개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조선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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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2월 19일. 제16대 대선 투표가 끝나고 오후 6시 서울 명동 거리에는 많은 시민들이 중계방송되는 전광판을 보며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조선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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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4일. 서울 고덕동의 한 고등학교 담벼락에 붙은 대통령 선거 벽보가 심하게 훼손되어 있다./조선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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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1월 30일. 제18대 대통령 선거 벽보 첩부가 시작된 이날 오후 서울 종로구 율곡로를 지나던 어린이들이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며 후보들의 벽보를 보고 있다./ 조선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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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의 역대 대통령 선거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국가기록원
조선일보 DB
[구성 및 제작 = 뉴스큐레이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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