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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7 (월)

“문예동인 ‘단층파’는 유항림네 헌책방에서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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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길을 찾아서】 (16) 평양 문단과 ‘단층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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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일제는 중국 대륙을 침략했다. 중일전쟁은 점차 ‘대동아전쟁’으로 확대되어 1945년 일제의 패망 때까지 짙은 암흑기로 이어졌다. 비록 전시 체제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청년들의 낭만까지 모두 앗아 갈 수는 없었다. 암흑기라 해도 예술은 살아 있어야 했다. 모임 장소가 필요했다. 하여 다방이 성황을 이루면서 이른바 ‘다방 시대’를 이끌었다.

그 시절 평양 시내에도 7군데의 다방이 있었고, 그 가운데 서양 고전음악을 감상하는 ‘세르팡’이 유명했다. 다방은 소설가 이효석의 표현대로 ‘사각모패’(학생)의 차지였다. 세르팡에 가면 으레 열띤 토론이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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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40년대 일본 지식인의 인기 잡지 <세프팡>의 표지(1931년 6월호). 평양 예술인들의 아지트였던 고전음악 다방 ‘세르팡’이 따온 이름이다.


한번은 초현실주의 등 현대예술 관련 토론이 벌어졌다. 옆 테이블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청년이 불만스럽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초현실주의 같은 사조는 인정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시인 윤동주, 바로 그였다. 북간도 명동촌 출신인 윤동주는 한때 평양 숭실학교를 다니기도 했지만, 1940년대 초 연희전문 시절에도 곧잘 평양 나들이를 했다. 숭실학교 동기이자 훗날 만주로 간 시인 김조규와 가까운 사이였다. 시인으로서 윤동주라는 존재는 아직 세상에 드러나지 않을 때였다. 그는 일제 말 일본 감옥에서 비명횡사했고, 사후에야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가 출판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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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기는 윤동주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년)의 제목이 1930년대 일본에서 인기 있던 프랑스 작가 앙드레 샹송의 <산과 바람과 태양과 샘>(1931년)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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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잡지 <세르팡>을 발행한 제일서방에서 나온 앙드레 샹송의 <산과 바람과 태양과 샘> 일어판. 프랑스판 원제는 <청춘의 4요소>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단어 나열식 제목은 그 시절 익숙한 표현법의 하나였다. 도쿄에서 발행된 <세르팡>(제일서방 발행) 같은 문예지에 자주 소개한 프랑스 문학의 영향이었다. 김병기는 프랑스 작가 앙드레 샹송의 <산과 바람과 태양과 샘-청춘의 4요소>(1931, 제일서방 발행)란 작품을 읽은 기억도 있다고 회고한다. “어쩌면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 같은 제목은 프랑스의 ‘산과 바람…’의 영향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럼에도 윤동주의 문학이 위대한 것은 신감각파를 통과하고 난 이후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빌딩을 보고 ‘하모니카’라고 표현한 황순원보다 더 감각적일 수 있다. 아무튼 윤동주는 새로운 현대시의 포럼을 거친 민족시인이라고 생각한다. 김조규의 시 역시 신감각파를 통과한 작품으로 주목을 받았다. 김조규는 ‘단층파’의 일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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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작품집 형태였던 <단층>은 1937년 4월 제1책(사진)부터 40년 6월까지 부정기적으로 4차례 내고 종간했다.


‘단층’(斷層), 1930년대 후반의 평양에서 활동한 문학 동인의 이름이다. 1937년 4월부터 1940년 6월까지 4차례 동인지 <단층>을 출간했다. 동인지에 발표된 작품은 시 29편, 소설 17편, 평론 4편으로 소설의 비중이 높았다. ‘단층’은 소설 중심의 문예 동인이었고, 창간호에 소설을 발표한 동인만 해도 김이석·김화청·이휘창·김여창·유항림 등이었다. 황순원과 김조규 등도 일부 참여했다. ‘단층’이란 의미는 동인 김이석의 설명대로 ‘새로운 문학으로서 문단과 층계를 지어보겠다는 기개’의 표현이었다. 이들은 제목 ‘단층’과 더불어 불어 ‘La Dislocation’(라 디슬로카시옹)을 병기하여 프랑스에 대한 선망을 표시했다. 동인 활동 기간은 중일전쟁 기간과 일치했다. 암울한 시대였지만, ‘단층파’는 정지용과 김기림 등의 ‘경성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 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면 평양에서 어떻게 ‘단층’이 만들어졌을까.

‘단층파는 1914~16년 사이에 평양에서 출생한 광성고보 졸업생들 가운데 유항림이 운영하던 고서점에 매일 모여 문학담을 나누던 모임으로부터 출발했다. 동인지 발간은 경성 중심의 문단, 통속적 상업주의적 저널과는 무관하게 자율적인 문학 공간을 확보하려는 차원에서 기획된 것이었다. 잡지 발간에는 혈연과 개인적 친분, 지역 연고에 의한 후원이 작용했고, 동인들은 일종의 살롱처럼 사교 및 지성적 대화와 토론의 장을 열어 평양 모더니스트의 예술공동체적 분위기를 형성했다. 동인들 사이의 지적 연대감은 해방 이후 대외적인 문화 활동으로까지 이어졌다. 단층파에는 평양 출신의 미술가인 김병기와 문학수도 포함되어 있는데, ‘단층’ 편집에 미술과의 접목이 시도된 것은 이 때문이다. 특히 입체파와 초현실주의, 추상미술에 대한 관심은 단층파의 예술적 지향을 암시한다.’(박성란, ‘단층파 모더니즘 연구’, 인하대 박사학위 논문, 2012)

‘단층’은 문학 동인이었지만 잡지의 표지화와 삽화 담당으로 화가 김병기·문학수·이범승 등이 참여했다. <단층> 제2호(1937년 9월)와 3호(1938년 3월)는 제호·그림까지 표지 디자인 전부가 김병기의 작품이다. 특히 2호는 각이 진 서체의 제호 아래 두 개의 사각형을 분할한 추상적 도상으로, 어쩌면 마티스나 피카소 같은 인상을 준다. 이런 도상은 매우 진취적인 것으로 당시 미술계의 동향과 견주어 보았을 때, 이색적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 터진 이래 암흑기
평양 고전음악 다방 ‘세르팡’ 아지트
‘사각모패’ 모여 초현실주의 토론중
“자리 차고 나간 청년이 ‘윤동주’였다”


광성고보 출신 선후배 동인 ‘단층’ 꾸려
김이석·김화청·이휘창·김여창·황순원 등
“웃거리 태양서점 모이던 문학청년들”


김병기도 문학수·이범승과 ‘그림’ 담당
“단층 2·3호 제호와 표지화·삽화 그려”
인쇄는 친형 김병룡 운영한 기신사에서
“형과 이태준·최명익은 ‘삼총사’ 절친”


이효석 ‘숭실’ 교수때 김동원네 셋집에
소설 ‘화분’ 배경인 정원 넓은 푸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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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 동인 ‘단층파’의 주역이자 윤동주와연희전문 동문인 시인 김조년. 훗날 북에서 애국시인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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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기의 바둑 친구이자 ‘단층’ 동인으로 해방 이후 월남해 활동했던 소설가 김이석.


<단층>의 인쇄는 김병기의 친형(김병룡)이 운영하던 기신사 인쇄소에서 맡았다. 마지막 한 호를 제외하고, 1~3호를 평양 기신사에서 맡았다.

“병룡 형은 나보다 아홉살이 많았다. 우리 아버지(김찬영)로 보면, 15살의 소년이 소년을 낳은 셈이어서 부자 사이가 어색했다. 형은 일찍이 평양을 떠나 중국에서 독립투사들의 심부름하면서 자랐다. 그러니까 중국옷을 입고 북경이나 남경 등에서 살았다. 나중에 일본 법정대학 경제과를 졸업했다. 일본에서 귀국할 때마다 형은 <전기>(戰旗)라는 잡지를 들고 왔다. 일경에게 들키면 감옥이라도 끌려갈 수 있던 시절이었지만 숨겨 갖고 왔다. 그때 나보다 10살 정도 윗대 지식인들은 대개 사회주의자였다. 마치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알았다. 형은 6·25 전쟁 때 피난길에서 사회주의와 결별했다. 형이 운영하던 기신사는 평양에서 제일 큰 인쇄소였다. 흔히 ‘단층’을 최명익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최명익의 동생 최정익도 소극적으로 참여했을 따름이다. 최명익은 소설가 이태준의 친구였다. 서울의 이태준이 평양에 올 때면 형·최명익과 어울려 삼총사처럼 절친했다. 형은 아버지와 나를 ‘생활자’라고 부르고, 자신은 ‘방관자’라고 불렀다. 일종의 딜레탕트라고 볼 수 있다.

단층파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유항림은 본명이 김영혁이고 광성고보 선배였다. 그는 <마권>(馬券) 같은 소설을 썼다. 그때 평양에도 경마장이 있었다. 그는 웃거리(조선인 마을) 헌책방집 ‘태양서점’의 아들이었다. 평양 유일의 고서적 판매점이었다. 그 덕분에 그는 어릴 때부터 독서를 많이 하게 되었고, 결국 소설가가 되었다. 그 책방에 문학하는 이들이 모여들며, ‘단층’ 동인이 조직되었다. 유항림이 가장 좋아하던 일본 소설가는 다자이 오사무였다. 다자이 오사무는 전후 일본 사회의 단면을 잘 그렸다는 <사양>(斜陽)의 작가다. 전쟁 이후 이른바 ‘사양족’을 만든 장본인이다. 그는 ‘태어나서 미안하다’라는 말을 남겼고, 끝내 정사(情死)에 성공했다. 유항림은 월남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월남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는 삼팔선에 가서 떡장사나 할까’라면서 농담을 하곤 했다. 그렇다고 그는 김사량처럼 ‘김일성 편’에 서지도 않았다. 유항림은 예술가 티를 내지 않고 시골사람 행색으로 다녔다. 하지만 냉철하게 사회를 비판했고, 일본 제국주의나 자본주의를 비꼬는 소설을 쓰기도 했다. 그의 대표작 <구구>(區區)는 의미 없는 일상을 의미 있는 것처럼 묘사했다. 하지만 그의 소설은 평양 기질을 잘 표현한다고 평가받았다. 1946년인가 유항림, 이휘영과 같이 서울에 다녀온 적도 있었다. 삼팔선을 넘을 때 미군보다 소련군이 더 무섭게 보이던 시절이였다.

김이석은 저항적 성격이 강해 반일 성향의 소유자였다. 그는 광성고보 시절 조선인이면서 일본 육사 출신인 교련 교사를 가장 싫어했다. 나는 그와 바둑을 두곤 했는데, 언젠가는 자꾸 물려달라고 요구해 내가 바둑판을 뒤집어엎은 적도 있다. 김이석은 월남하여 작품 활동을 했고, 나는 그의 장례식장에서 오랫동안 눈물을 흘린 기억이 있다.

김화청은 나와 동기생인 소설가다. 웃거리 종로보통학교 부근에서 포목이나 어물 같은 것을 취급하는 판매상 집안이었다. 그 부친은 부인을 2명 두었는데, 김화청은 소실의 아들이다. 두 부인과 자손이 같은 집에서 살면서도 화목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나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얼굴이 솟아오르는 달처럼 넓적했다. 그는 평소 공부하는 것 같지 않았는데, 시험만 보면 항상 우등생으로 뽑혔다. <단층> 제2집에 소설 <스텐카라친의 노래>를 발표했다. 그는 1·4 후퇴 때 나와 같이 월남하다 도중에서 사라졌다. 어쩌면 서울 대신 평양으로 되돌아갔는지 모른다.

김조규는 ‘애국시인’이다. 그의 부친은 민족주의 사상이 투철한 김명덕 목사로 3·1 독립운동과 연루되어 옥고도 치렀다. 숭실학교와 연희전문을 다녔다. 황순원과 더불어 소년 시절부터 문학 활동을 했다.

평양 문단에 주영섭이라는 독특한 인물이 있었다. 그는 나의 광성고보 4년 선배였고, 보성전문 출신으로 도쿄 법정대 법과를 다녔다. 주영섭은 유명한 ‘주(공삼) 목사집’ 아들로 주요한·요섭·영섭의 3형제 가운데 막내였다. 주영섭은 나하고 직접적인 인연이 많다. 왜냐하면 우리 부부가 그 부부를 중매했기 때문이다. 내 아내의 평양 서문고녀 동창생(채정숙)을 소개해 맺어졌다.

도쿄 시절 주영섭은 학업 대신 연극운동에 전념했다. 고리키의 <밤주막>을 연출했다. 그가 있어 ‘동경학생예술좌’가 존재한 셈이다. 그는 귀국해서도 서울과 평양에서 연극 활동을 했다. 이해랑이나 김동원 같은 ‘1세대 연극인’을 만들어낸 것도 그였다. 유치진과도 관계있다. 연극운동하다가 영화제작자가 되었다. 일본 영화사에도 있었다. 북에 남아 <금강산 처녀>라는 영화를 찍은 이후 소식이 끊어졌다. 그가 서울에 와서 활동했다면 연극계의 중심인물로 주목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학처럼 키도 크고, 장발이고, 윌리엄 와일러 감독을 좋아했다.

주영섭의 시 ‘밤차’(<비판>, 1933)에 이런 구절이 있다. “오오 궤도! 두 평행선!/ 그들은 언제나 언제나 교차되지는 못하리라.” 교차되지 않는 평행선, 자본가와 빈민가일까. 또다른 작품 ‘절음발이 병사’(<비판>, 1933)의 내용은 산업재해의 피해 노동자 이야기이다. 윤전기 사고로 다리를 잃고 보상도 받지 못하고 해고되는 비극을 그린 것이다. 식민지 현실에 대한 고발 성격의 현실주의적 작품이다. 그는 본래 사회주의자였다. 그럼에도 일제 말 대화숙(大和塾)에 가입해 일본 군국주의에 협력했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일제 말 자신의 죄과를 염두에 두었는지, 양심적 태도 때문이었는지, 처자식만 월남시키고 자신은 북에 남았다. 그의 가족은 서울에서 살기 어려웠는지 미국 로스앤젤레스(LA)로 이민 갔다. 그의 부인은 바느질공장 같은 데서 일하다 눈까지 멀었다. 주영섭 역시 처자 없는 말년 생활을 비참하게 보낸 것으로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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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이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1934~40년 단란한 가족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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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가족은 평양 시절 김병기의 장인 김동원의 만수대 대저택 정원에 있던 작은 양옥 푸른 집에서 세들어 살았다. 2009년 평창군은 봉평 생가마을에 소설 <화분>의 배경이 된 ‘푸른집’을 재현해 놓았다.


소설가 이효석도 생각난다. 그는 1934년께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와 평양에서 살았다. 그때 장인(김동원)의 집이 숭실학교에서 가까운 만수대에 있었는데, 그 동네에서 제일 큰 집이었다. 마당이 넓어 육모정 정자도 있었다. 이효석은 바로 처갓집의 현관 옆 셋방에서 살았다. 이효석의 소설 <화분>에 등장하는 바로 그 ‘푸른 집’이다. 나는 이효석을 몇 차례 만나기도 했다.”

구술·녹취 윤범모/동국대 석좌교수

기획·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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